한 달여 여행에서 돌아와 밤낮을 바꿔 보름을 산 것 같다.
굳이 시차를 극복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몸이 제 리듬을 알아 찾겠거니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뒤바뀐 밤낮이 본래 그랬다는 듯 좀체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무기력한 낮과 조금 덜 무기력한 밤.
지난 겨울은 그다지 춥진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추운 계절을 먼나라에서 춥지 않게 보내고 한시름 놓을 계절이 되어 돌아왔다.
호사를 누렸다 생각하니 한계절 꽃까지 욕심내지는 말아야지 맘먹었다.
산동의 산수유, 광양의 매화가 피고 지도록 마음이 견디지 못하게 설레지는 않았다.
하지만 산수유 핀지 열흘은 넘어 남도 나들이 제안을 받았고 가보니 축제가 끝난 평일의 산수유 마을엔 인적조차 뜸해 쓸쓸한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빛바랜 산수유가 아직도 남아 진정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깨 수술비에 보태야 한다며 품목도 다양하게 햇살만 가득한 텅빈 마을길 한 켠에 노점을 벌인 할머니 말씀이 사람들이 죄 벚꽃 축제장으로 몰려갔다고
했다.
할머니야 장사가 안되어 딱하지만 사람에 치이지 않으니 나는 좋았다. 그래도 병원비가 아쉬운 할머니를 위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소소한 것들을 샀다.
김부각이나 고로쇠물 같은 거.
이렇게 올봄 미친 듯한 나의 꽃놀이는 시작되었다.
따뜻한 겨울을 난 꽃나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화를 하질 않고 일시에 와르르 봄을 쏟아놓고 말았다.
산수유와 벚꽃이 같이 피는 경우는 내가 구례로 꽃구경 다닌 이래로 처음인 것 같다.
섬진강 굽이굽이 꽃망울이 마구 터졌다. 포근한 날씨로 아침과 오후가 확연이 달랐다.
섬진강을 따라가다 내친 김에 쌍계사까지 가볼 참이었는데 오후가 되니 어느 틈에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에 화들짝 놀라 회항을 했다.
꽃에 정신 팔다 해 저물도록 발이 묶일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꽃에 미친 사람이 너무 많다.
미치려면 꽃에 미치는 것이 그 중 행복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쌍계사를 포기한 대신 그 전에 몇 번이나 아쉽게 지나쳤던 운조루를 마침내 들렀다.
운조루는 문화 유씨 입향조인 유이주가 1776년에 지은 집이다.
몇 년전 종가의 음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처음 알게 되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때 티비로 뵈었던 종부님을 직접 뵐 수 있었는데
그전보다 많이 늙으셨다.
집은 아름다웠지만 사람의 따뜻한 훈기와 손때 반들거리는 정성이 이제는 구석구석 미치지 않음이 느껴졌다.
고택을 몇 군데 본적이 있지만 이곳처럼 아기자기하고 변화무쌍한 구조를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구석구석 살피는데 보물찾기 하는듯, 숨박꼭질
하는 듯 했다. 무심한 듯 핀 꽃이 많았다.
고생도 많았을 종부님이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누마루에 올라서서 한참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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