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가장 절감하게 한 것은 집 옆 자그마한 밭에 핀 매화였다.
담 너머, 우리집보다 지대가 조금 높은, 우리집과는 담장을 사이에 둔 비탈밭 매실나무가 이십여주 있다.
방울방울 매화꽃 봉오리가 맺히는 것부터 하나씩 소리 없는 환호처럼 꽃이 터지는 순간, 그리고 마침내 꽃이 져가는 얼마간의 침묵까지
시시각각의 변화를 다 목도했다.
어느 날 아침 운정이가 몹시 짖었다.
겁이 많아 시시때때로 짖어대는 운정이를 꾸짖느라 창밖을 내다 보니 매화밭의 주인이 밭을 거닐며 휴대폰으로 꽃사진을 찍고 있다.
일년에 몇 번 겨우 들르는, 밭을 돌볼 틈이 없어 그나마 매실나무를 심어놓고 근근히 밭을 유지하고 있음에 분명한 시내의 직장인이다.
매화 필 무렵 꽃구경 삼아 한두 번, 매실 딸 때 몇 번, 그리고 가을에 가지치기 하러 한두 번 들르는 게 다다.
여름이 되어 잎이 울창해지면 담밖이 어둑해져 나무 심은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나이지만 봄만큼은 나는 꽃을 내것 삼으며
주인보다 몇 백배 눈호강을 한다.
마당에 나선 나를 매화주인이 담너머로 내려다 본다.
그도 분명히 생각할 것이다.
'내 매화는 온전히 저 여자 것이로구나.
나는 구경꾼처럼 별러 들러 겨우 사진 몇 장 찍어 지인들에게 발송하고 말 뿐 저 여자처럼 오롯이 눈에 마음에 담지는 못하는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꽃은 보는 이의 것일 뿐, 주인을 논하는 것은 꽃에 해당되는 일은 아니니,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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