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그림

고양이로 하여 추운 삶에 대해 생각한다(17.12.13)

heath1202 2017. 12. 13. 03:23

오지게 춥다.

집안에만 있는데도 춥다.

양말 신고 가디건 걸쳐도 발이, 어깨가 시리다.

이런 날은 꼼짝 말고 집에만 있으렸다.

그러고 싶고 그게 합당하면 내 맘대로 그럴 수 있는, 내 삶에 권력이 커진 나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길고양이 밥 주러 잠깐 나간 것 말고는 삼십 시간 쯤 꼼짝 않고 집에 있었다.

하지만 날이 추운 탓일까.

엄마 생각으로 심란하고 길고양이도 걸린다.

여섯 시 쯤 해서 결국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야산 밑 길고양이 먹이통에 사료를 부어주는데 어둠 속에 휘부연하게 고양이가 기다리고 있다.

미안하다. 내가 조금 늦게 나와 널 추위 속에 한참을 기다리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붓는대로 얼어버리는 물통에 생수 조금도 부어주었다. 다음 차례 녀석이 올 때 쯤엔 물이 꽁꽁 얼어있겠구나.

혀가 쩍쩍 붙는 얼음이라도 핥아 먹으려나.

나도 먹지 않는 감자탕을 사가지고 엄마한테 갔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지만 늙은 엄마는 드셔야 한다.

가열만 하면 되는 낙지볶음이랑 몇 가지 식재료도 챙겨 드린다.


집에서 아쉬운 대로 고양이 사료도 한 봉지 퍼갔다.


엄마집 주변의 몇 마리 고양이들 때문이다.

그곳은 도시와 달리 음식 쓰레기조차 귀해 생쥐라도 사냥하면 모를까, 늘 춥고 배를 주려야 할 터다.

엄마는 옛날 사람 답게 동물과 사람의 삶에 대한 분간이 뚜렷하지만 부처님을 열심히 믿는 만큼 생명에 대한 연민이 남다르고 윤회도 믿는다.

그래서 고양이들에 대해서 나름으로 개사료 몇 알, 음식물 찌꺼끼라도 챙겨주려 애쓰는 편이다.

근래에 엄마가 가장 애달퍼 하는 목숨이 하나 있다.

이웃에 타관에서 들어와 살던 여자가 있었다.

나름 경제력도 있고 딸린 식구도 없던 여자는 개 여러 마리와 고양이 두어 마리를 길렀다.

그것도 시골개, 시골 고양이처럼 기른 것이 아니라 작은 견종들은 깨끗이 씻기고 견사에 난로며 선풍기도 틀어 주고 깨끗한 장판도 깔아

사람이 함께 누워도 거리낌 없을 만큼 좋은 환경에서 정성들여 길렀고 진돗개 한마리도 말끔한 집과 너른 뜰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한다.

그런데 두어 달 쯤 전에 그 여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형제 자매며 일가붙이들이 어느 날 모여 쓸만한 세간을 나누고 동물들도 데려갔다 한다.

한데 모여 살던 아이들(동물들)은 뿔뿔이 흩어져 낯선 사람들의 품에 안겨 낯선 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나마 갈데가 있어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 녀석이 남았다.

늙고 눈이 멀어가는 노묘 한 마리를 떨구어 놓고 간 것이다.

이 녀석이 이제 엄마의 근심 중 하나가 되었다.

제 집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 영역을 넓혀 엄마 집에도 한두 번 발을 들였던 모양인데 엄마가 기르는 어마어마하게 기운 센 풍산이가 고양이를 보고

미쳐 날뛰는 통에 함부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되었다.

집에 갈 때마다 그 애달픈 사정을 얘기하는 지라 오늘은 정신 차려 잊지 않고 사료를 챙겨간 것이다.

엄마한테 챙겨주기를 신신당부 했다.

녀석에게 올겨울은 아마 묘생 가장 참혹한 추위일 테고, 어쩌면 새봄을 보지 못할 지도 모른다.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돌연 닥친 이 삶이 참으로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울 터다.


목숨은 왜 이리도 슬픈 것인지.

아무 욕심부리지 않아도 무난히 돌아가는 복많은 삶임에도 나는 삶이 참 어렵다.

엄마는 목숨들 거두는 내가 복받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저 슬프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