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 만보기 앱은 39걸음을 기록했다.
종일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나는 현관문만 잠깐 빼꼼 열어 비젖은 운정이 불러 간식만 두번 챙겨주었을 뿐이었다.
비가 오니 창문을 조금 열어 고양이들도 비를 보거나 봄의 냄새를 맡아보라고 두었다.
온종일 하염없이 정리를 했다.
이십 여년을 제대로 털어내 본 적이 없는 집에는 구석구석 이제는 쓸모 없어진 물건들이 쟁여져 있다.
추억과 번잡함의 무게를 견주어보면 거진 추억이 졌고 나는 그리움이 없어져 이제 더 이상 추억이 아닌,
그래서 삶의 어느 한때 배설물로 남은 물건들을 사정없이 비닐 봉투에 담았다. 개운했다.
이제는 물건 뿐 아니라 머릿 속도 그렇게 비우는 것이 수월해졌다.
카페에 왔다가 깜짝 놀랐다.
하아, 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바가 오는 중에도 꽃을 피우려 애를 썼던가, 창가가 흐드러진 벚꽃으로 환했다.
고맙게도 카페 안의 각기 혼자 앉은 서너명 손님들은 모두 묵묵해서 카페는 음악소리 말고는 적막했고
나는 까닭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난 두어달, 나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보류하고 살아보기로 했었다.
혹시 조금 깊어지는 것이 있을까 싶어.
헤프게 감정을 토로하는 것도 멈추었고 생각보다 부지런히 생활을 꾸리고 별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틈나는대로 책을 조금 읽을 뿐이었다.
그랬더니 행복한 중에 가슴 속이 점점 빈항아리 같아졌고 나는 나를 잃을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랬는데, 결국 오늘 울고 싶어졌다.
공교롭게도 나는 노쇠에 대한 책을 들고 나왔었고, 꽃을 보며 그런 책을 읽지는 말 일이었다.
그냥, 하아, 먹먹한 가슴을 누르며 잠시 팔을 베고 탁자에 누워 창밖을 내다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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