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김치를 담갔다.
돈복은 없었어도 인복은 좋아, 이제껏 살면서 김치를 다섯 번이나 담그어 보았을까, 김치 담그는 일은 일 년에 한 번도 잦은 일이었는데
역시 시간이 많이 나다보니 진심 충천하는 의욕도 있고, 또 더 이상은 남의 선의를 착취하는 일은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사실은 종갓집 김치 세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현듯 내가 담그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재래시장을 다니다보면 다듬는데 손이 좀 가는 총각무를 잘 다듬어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었기에
노동에 대한 별 부담 없이 선뜻 대든 것이었다.
막상 시장에 가보니 채소전을 다 훑어도 다듬어진 것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평소 엄두 내보는 적이 없는 원자재를 구입했다.
한단에 4,500원인데 한 단 절이면 얼마 안된다고 해 두 단을 샀고 쪽파 5,000원 짜리 한단을 샀다.
집으로 돌아와 부엌 바닥에 던져 놓았다가 열한시 넘어 채소가 다 시들겠다는 생각이 펴뜩 들어 거실에 펼쳐놓고
텔레비젼을 봐가며 다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괜한 일을 시작했나 싶었는데 열두시 반 다 되어 다 씻어 가면서는
정말 괜한 일을 시작했구나 확신했다.
막상 절이려니 넉넉한 함지박이 없어 싱크대 닦아 절여 놓고는 레시피 하나 찾아보는 일 없이 풀 쑤고 닥치는대로 대충 가늠하여 양념 때려넣고
버무려 담고 나니 새벽 두 시가 넘었다. 딱 사진의 용기로 두 개가 나왔다. 맛은 글쎄...... 맛 있지는지 맛 없는지도 모르겠다.
간을 하도 여러 번 봐서.
대견해 하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내가 생산한 김치의 가격을 매겨 보았다.
종갓집 김치가 세일가로 5킬로에 37.000원이 조금 안되는 걸로 기억한다.
내 김치는 무와 골파 값으로 14,000원, 그리고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고춧가루, 액젓, 새우젓, 깨소금, 마늘, 생강, 쌀가루 등이다.
재룟값으로 널널히 잡아 20,000원이 들었다 치면 나의 노동으로 17,000원을 절약한 셈이 된다.
그런데 정말 이건 아니지 싶은 것이 비숙련공임을 감안해도 나의 노동의 댓가가 너무 저렴했다.
무려 세 시간의 노동의 댓가가 17,000원이라니. 수입이 급감한 상황에서 이만한 돈이라도 벌었다 쳐야 하는 걸까?
나는 살면서 시간이 없다고, 피곤하다고, 차라리 사는 게 더 싸게 먹힌다고 손수 음식을 만드는 일을 피해 왔고 음식을 구입해 먹는 것을 당연시 여겨왔고
지금도 그 생각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장일을 하면서 또한 음식 만드는 일에 헌신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노동의 착취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확고한 내가 지금 내가 일을 놓고 한가해지니 이런 수선을 떨어가며 몸소 음식도 만들어 보는 것인데, 시간이 넉넉한 탓에
옛날처럼 속이 상하지 않고 조금은 보람도 있다손 치더라도 주부의 노동의 가치는 대체 얼마가 적정한가가 자꾸 생각되는 것이었다.
사먹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내 말에 "그래도 손수 만들어 식구들을 맛있게 먹이니 얼마나 뿌듯하냐"는 치사가, 내게는 앞으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노동을 회유하는 씨알도 안먹히는 당근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노느니 염불한다고 이전보다는 음식하는 일이 잦겠지만 그래도 반드시 나의 노동에 대해 한 번씩 짚고는 넘어가야 겠다고, 그리고 필요하다면
가차없이 제껴 버리겠다고 다짐을 한다.
나라고 공들여 음식해서 식구들 먹이는 것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마는 나는 굳이 위악을 떨어서라도 나를 일깨워가며 살고자 한다.
내가 이제와서 이를테면 새삼 친정엄마 손맛 신화를 쓰겠다고 퇴직한 것은 아니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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