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그림

일용할 양식(17.3.15.)

heath1202 2017. 3. 16. 03:54

사람이 말에 고파 죽기도 할까?

그렇다면 얼마나 굶주려 그리 될까?

오늘 내가 사람에게 한 말은 딱 한 문장이다.

카모마일 차요.

어제는 좀 나았던가.

그래, 어제는 스무 마디는 했겠다.

겨우 얼굴만 아는, 이름도 아직 모르는 이들에게 인사를 했고 슈퍼에 들러 물건을 몇 가지 샀으니까.

인간과 이렇게 소통 없이 지내는 것이 아직 불편하지는 않지만, 한편 삶의 의미를 생각할 때 염려스럽고 두려워질 때가 있다.

불안을 무마하려고 위안하고 변명한다.

고작 두 주 째인걸.

일을 그만두며 꿈꾸었던 나의 시간이란 것이 생각했던 것처럼 넉넉하진 않다. 

너무도 헐거워진 스물네 시간은 각박한 일상의 틈새로 절박하게 움켰던 얼마 안되는 시간과 맞먹는다는 생각이 든다. 밀도의 문제인가.

물론 지금의 평화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안락이지만, 그로하여 정신이 무력해지는 순간도 또한 경계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세 시간 동안 책을 읽었는데, 일독이 끝난 책을 밑줄 그은 부분만 재독을 하였다.

기시감이랄까, 읽었던 기억만 있을 뿐이었지 내 입으로 호명하고 구술할 새로운 이름도 작품명도 에피소드도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허망했다. 이런 비효율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렇다면 정말 시간낭비 아닌가.

버리지 못하는 나의 탐욕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읽는 순간만은 행복하니 그걸로 되었다고 위안을 삼아야 할까.

생각할 일도 많고 시간도 많으니 조급할 일은 아니다.

하루 한 가지씩 청소를 하고 하루 세시간 씩 책을 읽으며 천천히 천천히 생각을 가닥잡아 가면 될 것이다.

나의 삶이 의미 있고 아름답게 채워질 수 있기를.


배탈이 난 듯 하여 가뜩이나 빈약한 끼니도 편히 못 먹고 하루 한 잔 용량의 커피도 건너 뛴다.

(커피는 아깝지 않은데 민트나 카모마일차를 마시면 효용이 뚝 떨어져 심히 돈 아까운 생각이 든다.

그래도 자릿값이려니, 그 정도는 기꺼이 치룰 용의가 있고, 또 그래야 하지.)

소설가 김중혁이 그랬나. 일상을 사는데에 배낭 속에 온갖 물건을 다 소지하고 다닌다 했다.

내가 좀 그렇다.

아이가 그랬었다. 가방에 벽돌 넣어가지고 다녀? 왜 이렇게 무거워?

1 퍼센트의 사용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온갖 것을 다 챙겨가지고 다닌다.

잠깐 책 한권을 읽는데도 이런 식이다.

혹시 변덕 날지 모르니 여분으로 장르가 다른 책 두세권 쯤, 연필 몇 자루, 책갈피, 좋은 지우개, 포스트잇, 이어플러그, 노트, 칼,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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