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그림

해마다 당하면서도 봄이구나, 또 방심했다(17.3.8.)

heath1202 2017. 3. 9. 02:23

백수답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늦게 잠자리에 들 때마다 느꼈던 내일의 기상에 대한 불안과 이미 일을 마친 듯 천근만근인 몸뚱이, 그 몸뚱이를 끌며 일어나야 하는

비애와 울분은 이제 안녕이다.

내 기상 시간에 이미 일터에서 분주할 벗들에게 아주 잠깐 느끼는 미안함 말고는(사실 그럴 필요도 없지만) 오롯이 평화 그 자체다.

늦은 아침 삼아 요기를 하고 있는데 지인에게서 점심 함께 하자는 연락이 왔다.

내가 마음에 쓰이는 건가. 혹시 혼자 외로울까봐?

어찌되었던 고마운 일이다. 연락해 준 것도 고맙고 모처럼 분주하게 움직일 일을 만들어 준 것도 고맙다.

부랴부랴 씻고 저녁 때까지 밖에서 돌 준비를 마치고 나가 맛나고 정갈한 점심상을 받았다.

점심 마치고 지인은 다시 일터로, 나는 나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는 일하는 지인이 부럽지 않지만(시간 지나면 부러워질까? 그러면 아니될 일이다.) 지인은 이 순간 내가 부러울 터다. ㅎㅎ


탁자 위에 책과 필통과 안경과 휴대폰, 그리고 이어플러그까지 가지런히 늘어놓고 탁자를 당겨 자세를 잡고 손님을 스캔한다.

나와 비슷한 입장인 듯한 나이 지긋한 각기 온 두 명과 어린 학생 하나.

어제와 똑같은 레퍼토리의 음악. 그런대로 괜찮은 노래들이지만 음량이 좀 크다.

길게 죽치는 입장에서 음량을 낮춰 달라고 요청하기는 좀 그러니 이어플러그를 낀다.

칠십 퍼센트 쯤 소거가 되어 책 읽는데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철학책을 읽어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어제 읽다만 미술사를 마저 읽는다.

잔혹 미술사라 역겨운 부분들이 많지만 흥미롭기는 하다.

날이 흐리니 어둡기 전에 걸어보려고 창 밖을 내다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사진 속 사비로 안내판이 마구 나부낄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고 성긴 눈발과 함께 빗낱까지 들고 있다.

궁남지가 몹시도 을씨년스럽다.

나는 또 성급했구나. 간절함으로 비롯한 오산이다. 봄은 순순하게 오지 않는 것을.

세상에 다시 없이 심사 편한 나인듯 한데 마음이 퍽도 심란해진다.

마음이 너무 흡족하고 평안해서 요즘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 걱정하던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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