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그림

시간 쓰는 연습(17.1.12)

heath1202 2017. 1. 13. 02:43

요즘처럼 시간을 가지고 고심한 적이 없는 듯하다.

날마다 시간을 앞에 두고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잘 몰라 지켜만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에는 죽으나 사나 주어진 여건에 맞추어 쫓겨 살아야 했으므로 늘 나의 시간을 앗긴 것처럼 피해의식 속에 살긴 했어도

내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으므로 내 나름의 고민의 몫도 의미 없었고, 원하든 원치 않든 우격다짐으로 내 시간 속에 채워지는 무언가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오롯이 내것으로 주어지니 전에는 늪 같던 시간이 이제 자칫하면 공기처럼 잡히는 것 없이 기화해 버릴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한다.

길게 생각할 것 없이 하루만을 생각하는 것도 난감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하루가 너무 짧은 것이 가장 당황스럽다.

꼭 하고 싶은 일로 잡아놓았던 일은 걷기, 독서, 드로잉과 악기 배우기였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이것들을 다 하자고 한다면 마치 학교 등교하듯, 1교시 2교시 시간표라도 짜야 할 것 같다. 이러자고 퇴직한 것은 아니란 말이지.

유유자적, 그러나 또한 알차게! 이것이 이렇게 어려운 포부란 말인가.


한 주 남짓, 제대로 한 것은 걷기였다. 다람쥐처럼 부소산을 나흘 걸었고 궁남지는 사흘 걸었다. 확실하게 한 시간 이상씩.

드로잉은 부담없이 텔레비젼 보며 조금 했다. 재미 삼아 하는 것이지만 언젠가는 부끄럽지 않게 스케치북 들고 밖으로 나설 수 있으면 하는

욕심도 살짝 내본다. 하지만 사흘 하고는 시간을 못내었다.

하루가 얼마나 빨리 가던지 책읽기는 짬도 못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씻고 운동 다녀와 텔레비전 보고 나면 하루가 다 가서.

탄핵 정국이 얼른 끝나야지 집에 있는 동안은 거의 뉴스를 보는 것 같다.  무슨 한 방 터지지 않나 하고.

내가 태어나 요즘처럼 와이티엔을 본 적이 없었다.

아, 처음으로 도서관을 가보았다. 이곳에 산지 반 세기 만에. 내가 어려서부터 있던, 내 나이 만큼이나 오래된 썰렁한 건물이라 기대가 없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장서가 풍성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간 김에 회원증도 만들었다. 하루 세 시간은 그곳에서 보낼까 탐색 나선 거였는데

삼십 분 쯤 앉아 있다 숨막혀 죽을 뻔했다. 너무 조용해서 책이 통 안 읽혔다. 게다가 나는 책에다 사정없이 연필을 그어대는 버릇이 있어

대출하기도 한계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줄 그을 필요 없고 잘 읽히는 이주헌의 미술작품 감상 책과 프로테스트 사진집을 대출해서

투썸 플레이스에 앉아 두 세시간 읽었는데 음악을 비지엠으로 깔으니 비로소 몰두가 된다. 앞으로 자주 그러면 될 것 같다.

또 책 읽고 나서는 바로 아래 궁남지로 내려가 걸으면 되고.  


결론은 하루가 너무 빨리 가서 좀 두렵다.

여유로운 것은 좋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나의 허무 강박이 나를 가만 내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무 성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자꾸 한 일을 셈하며 마음이 편치가 않다.

오늘은 집정리를 푸지게 시작했다.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언젠가 살 빠질 날을 기약하며 쟁여두었던 옷가지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쓸 만한 옷가지는 교회 나눔가게에 가져다 주고 허름한 것은 수거 상자에 집어 넣었다. 버리다보니 재미 들었는지 나도 모르게

머릿 속으로 다음 차례는 무엇을 버릴까 추리고 있다.

다음엔 다락 정리를 하고 그 다음에는 책도 정리해야겠다. 그런 다음엔...오랜 만에 집 내부 수리와 도배를 좀 해야 할까.

얼른 집도 마무리 지어 죽을 때까지 쭈욱 손 안 대고 살고 싶다. 다 빨리 빨리 정리하고 싶다.

오늘 퇴직이 결정 되었다. 홀가분하다. 하기로 했던 것이니 잘된 일,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