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에이포 용지만한 플라스틱 쟁반에
미지근한 믹스커피 한잔을 얹어 내왔다
얼른 먹고 떨어지란 듯
채 끓지도 않은 물에
미숫가루처럼 엉긴 커피가루를
휘휘 저어가며 가져왔다
분홍꽃무늬 점점 아이보리 쟁반에는
참 진득히도 앉은 생활의 때
입안에 미끈거리는
믹스커피 응어리를
서러움을 삭이듯 녹여가며
나는 별것도 아닌 일로 처량해진다
나는 지금 사무실 한구석에 던져진
빈 택배 상자와 다름 없고
복사기 옆 반뼘 쯤 쌓인
이면지보다는 더 쓸모가 없어
기가 죽어 입을 닥치고 조신히 있다
나는 무명씨가 된 설움을 체험하고 있다
남자는 유머 동영상을 보고 있다
보며 낄낄거리는데
헤드폰을 써서 그 웃음이 천연스레 높다
나는 사람이 얼마나 무심할 수 있는지
그 무심함을 얼마나 어떻게 견뎌내는지
계제에 자가실험이라도 하는 듯 싶다
식은 믹스커피 때문에 속이 메스껍다
창밖 운동장엔 폐농한 밭처럼 잡초가 무성하고
축구 골대 앞만 원형탈모처럼 반들거린다
아이들의 가여운 직무유기
뛰지 않는 십대의 사내아이는 암울하다
나는 남자의 냉대를 피해 나와선
제 존재이유를 잃은지 오래인
이끼 낀 시멘트 벤치에 앉아본다던가
철모르고 핀 노란 민들레꽃을 들여다본다던가
적막해서 더 눈이 시린
푸른 하늘을 아득히 본다
지금 이 세상엔 아무도 없다
자리 없는 이는 나 하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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