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그림

일과(16.8.2)

heath1202 2016. 8. 2. 22:44

7자를 불쑥 쓰고나서 멈칫합니다. 7월은 다 끝났는데.


지난 밤에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 날새는 것을 보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백수일과의 정석이니까요.

나는  얼리버드를 생각하면 갑자기 삶이 무거워집니다.  간혹이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백수의 천성을 타고 났는가 봅니다.

삶의 보람은 가급적이면 티나지 않게 얻어지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보람이라도 조금 많아지면 자칫 짐스러워지거든요.


그럼에도 깨어보니 아홉 시가 안되었습니다. 애를 써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퍼뜩 할 일을 생각해내었습니다.

오롯이 나의 허영만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니 희열이 느껴집니다.

책을 몇 페이지 읽고 아침으로 조리퐁 한줌을 몇 알씩 참새처럼 주워 먹고

감동란 한 알을 좀 오래된 것이라 감동없이 먹고

그냥 두면 썩힌다고 복숭아 대여섯 알을 다 깎아 먹기 좋게 조각내어 포크 찍어 냉장고에 넣어준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 후식으로 맛나게 먹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쉬는 날에는 좀체 없는 이른 세면과 화장을 하였지요.


시외버스를 타고 대전을 가는데 둔산동을 가려면 어떻게 가는게 좋을지 몰라서 관저동에서 버스를 내려

능사인 택시를 탔더니 갤러리아 타임월드 앞까지 8,800원이 나왔습니다.  볼 일을 마치고 나니 세 시는 되어

배가 몹시 고픈데 그렇다고 혼자 구석에 낑겨 뭘 우물거리기도 싫어 유판씨 비타민 알약을 네알이나 먹었습니다.

하루 용량이 두 알인데.  택시를 타고 서무터미널에 갔는데 5,500원입니다. 관저동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었군요.

담에 또 버스로 둔산 갈일 있으면 꼭 서부 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타야겠습니다.


서부터미널에 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택시가 섰는데도 터미널인지도 모르고 택시에 앉아있었다니까요.

아주 옛날에 고등학교를 대전에서 다녀 주말에 집에 갈 때 꼭 이용해야 했던 터미널인데, 세월이 흐르는 족족 그대로

사그러져 온 모양입니다. 버스도 몇 대 없고 가게는 더욱 없고.  편의점 하나도 멋모르고 들어왔다가 앗뜨거라 철수한

건가요, 가게라고는 식당 하나, 커피집 하나, 구멍가게 하나, 그리고 부여터미널보다 더 옹색한 표 파는 창구 하나.

하나 밖에 없는 고마운 구멍가게에서 요거트 비스켓을 사 맛나게 먹었습니다.  


부여에서 서울까지 한시간 사십오분이나 오십분 걸립니다. 논스톱이죠.

대전에서 부여는 한시간 이십오분 걸렸습니다.

곳곳에 다 서 주는 자상한 버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가 본 적 없는 곳으로 에둘러 가기도 합니다.

좀 텀이 긴 시내버스나 다름없었습니다.

급할 것 없는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버스에 오르내리는 승객들을 지켜 봅니다.  그 버스가 있어 얼마나 다행입니까.


버스가 서두르지 않으니 할 일 없는 내 맘은 더욱 한가롭습니다. 감흥없는 시도 열편 쯤이나 읽었습니다.

창 밖을 내다보니 저만치 마을의 어느 집 담장을 능소화 한 무더기가 싱그럽게 타고 앉아 있습니다.

요즘 어딜 가도 능소화 풍년입니다. 유행인가요?  문득 마이산 절벽을 끝모르고 타고 오르는 능소화가 생각났습니다.

우리 집에도 능소화 한 그루 심어볼까요.  그냥 두면 집도 삼킬 종자인데.

요즘 감당 못하는, 감당하기 싫은 손바닥 만한 목불인견 화단을 다 밀어버릴까 고민 중인데.


논산을 벗어나니 전화하는 이들이 네명이나 되어 신기했습니다. 어디로 나오라는 둥, 벌써 나와 있냐는 둥, 왜 이제 전화하냐는 둥.

시골 아주머니들, 아저씨들은 문자란 걸 모르고 다 음성통화를 하니 그들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머릿 속에 환히 그려집니다.

내 차는 터미널 앞에 잘 주차해 놓았는데도, 누군가 나와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습니다.


현관 자물쇠를 바꾸어서 여분 열쇠를 몇 개 복사하러 터미널 뒤 열쇳집에 갔습니다.  열쇠관리사 자격증이 있다는 걸 첨 알았네요.

암튼 갔는데, 부여읍에서 꽤 먼 세도면 사산리에 사는 할멈 한 분이 자물쇠가 고장나서 요며칠 창을 타넘고 다니는 중이라는데 

열쇳집 사장은 출타중이고 전에 내 도장도 파주었고 사장이 부재시엔 조금 어설프긴 해도 열쇠도 깎아주는 부인만 가게를 보고 있습니다. 

사산리 할멈은 사장이 언제 오느냐고, 여섯시까진 오겠느나고 애가 닳아 묻는데 사장 부인은 급할게 없군요. 내일 전화해준다니까요.

그럼 (사장이)일곱시까진 돌아 오지 않겠느냐니, 기약 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잊어버리고 집에 가서 오늘 하루더 창을 타라고 합니다.

요며칠 맨날 그러셨다면서요.

집에서 텃밭을 매다 왔다고 보아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의복으로 읍내까지 나온 사산리 할멈은 오늘 하루 더 창을 타 넘으러 터덜터덜 가게를

나갑니다.

전화 한 통 않함으로써  남편의 출타를 편안하게 지켜낸 그의 부인은 내 열쇠를 깎는데 애를 먹습니다. 먹통 열쇠도 분류가 되어 있는 모양인데

좀체 자신없어 하며 깎아낸 열쇠 세개가 변변치 않습니다.  쥐어짜듯 어거지로 문을 열기는 열었습니다.


햄 뺀 김밥 한줄과 떡볶기 일인분으로 거창하게 저녁을 먹고 아침에 읽던 소설을 폈는데, 앞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절망합니다.

정유정의 소설로 문체가 딱 내 취향인데 사건들이 너무 파편적이어서 좀 읽다보면 뒤죽박죽이고, 되돌아가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려니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들 그러네요. 인정해야 할 모양입니다.


역시나 참 부지런했던 백수의 하루였습니다.

즐거운 기대만 하나 더 보탤 수 있다면 원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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