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을 뭉개며 보냈다.
좀 늦게 잔 탓도 있지만 그리 보내도 시간 별로 아까운 줄 모르고 마음이 제법 너그러운 그런 날이 오늘이었다.
나를 결국 일으켜 세운 것이 참외였다.
나는과일을 좀 넉넉히 샀다 하면 대부분 끝물은 버리기 일쑤인데 참외 만은 다르다.
여름 한 철 참외는 대놓고 먹고 참외가 없으면 불안할 만큼 참외를 좋아한다. 무처럼 맛없어도 참외는 좋다.
(반면 수박은 여름 한철 한통 먹기 힘들다. 귀찮아서. 남이 깍둑썰어 주어야 먹는다. 수박물로 손 버리는 일은 절대 사절.)
암튼 참외 맛이 혀끝에 맴맴 돌기 시작해 이러다 오늘 밤을 온전히 살아 넘기지 못할 것 같아 결국 저녁 무렵,
남들 찬거리 장보느라 바쁜 슈퍼를 갔다.
장바구니를 보면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훌륭한 주부들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원자재를 사는 주부.
오늘 나의 쇼핑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은 딱 하나 참외.
그런데 퍼뜩 떠오른 영감인가 계시인가 깨달음인가, 뜬금없이 고추장 장떡이 떠올랐다. 평생 열번 쯤 먹어본 음식이 왜 하필 지금.
하여 부추 사고, 동그란 호박과 깻잎, 양파도 샀다.
그러다 또 떠오른 카레. 옛날 같으면 3분 카레 하나 사다가 급한 불을 껐겠지만 이제 나는 고기를 먹지 않으니까 카레를 만들어야 한다.
고기 뺀 온갖 재료. 감자, 당근, 양파, 버섯. 이 재료들을 와글와글 웍이 넘치게 담아 볶고 카레 가루 풀어 넣으면 끝.
나는 카레를 밥위에 얹어 먹는 경우가 드물고 대신 조금 싱겁게 해서 카레만 퍼 먹는다. 암튼 모처럼 한 번 해먹자고 재료들을 샀다.
그리고 바나나도 사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 식물성 조미료라니 연두까지 사고 나니 참외 한봉지로 시작한 게 결국은 4만 6천원어치 그득한
물품이 되어 버렸다.
어쩌다 대형 마트 가서 카트 가득 물건 사는 사람들 보면 놀랄 때가 있다. 나는 정말 그렇게 사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필요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예정 없던 물건들을 대형 봉지 2개 가득 담아 낑낑대며 나오는데 기분이 썩 괜찮다. 내가 그래도 나 먹이자고 모처럼 남한테 안 빠지게 장을 보다니. 과장하면 좀 사람답게 산다는 느낌? 내일은 장떡을 부쳐 몇 개 없는 접시를 두고 '어느 것이 좋을까요?' 골라서 장떡을 담아 먹어볼까.
요즘은 내 삶의 물품들 중에서 무엇을 제거해야 할까 틈틈이 궁리를 한다.
부엌 살림으로 치자면 내 결혼 때 와서 이제껏 음식 한 번 못 담아본,남자 한 번 못 안아본 채 나이 먹어버린 처녀같은 행남자기들과 변덕으로 짝안 맞게 사들인 물건들, 안쓰는 냄비들, 후라이팬, 하루에 물 한잔도 안 빼먹는 정수기 등등이 대상이다. 살아보니 그릇은 코렐 한 세트면 뒤집어 쓰고도 남고, 냄비 후라이팬은 모양따라 용도대로 쓰는 일이 일년에 몇 번 없다. 그리고 냉장고의 안 먹는 음식들. 변덕나서 만들어본 피클이라든가 장아찌 같은 것들(오해마시라. 맛이 없어서가 아니다.맹세컨대 맛은 꽤 괜찮다. 진짜 먹을 틈이 없다.) 난 고맙게도? 싸구려 옷가지를 좀 많이 사는 것 말고는(딴 건 몰라도 패션(씩이나?) 부분은 너무 소홀하면 자칫 감각 없고 따분한 사람이 되므로 나름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남들이 인정하거나 말거나) 물질적 욕망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얼마든지 소로우처럼 살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
문제다. 장을 보고 났더니 보는 것 만으로 이미 배가 불러 음식을 해야하겠다는 욕구가 사라졌다. 해프닝 같은 장보기. 다 배고픈 탓이었어.
음식 썩히면 부끄러운데...... 하루 한 가지쯤 음식을 해보는 것도 보람있지 않을까. 묵을 사다놓으니 이 늦은 시각에 묵밥이 먹고싶다.송송 썰어참기름에 무친 신김치 얹은.
'삶의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면(16.8.16) (0) | 2016.08.17 |
---|---|
유성우가 내린다길래(16.8.13) (0) | 2016.08.13 |
일과(16.8.2) (0) | 2016.08.02 |
흐뭇한 휴가 계획(16.7.20) (0) | 2016.07.20 |
고래 (0) | 2016.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