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다섯 시 반 차를 타고 내려오니 부여에 일곱시 이십분 도착. 부랴부랴 택시 잡아타고 집에 가 차를 가지고 무량사를 향했다.
무량사는 내가 무시로 드나드는 절 중 하나인데 특히 무량사 연등을 보는 일은 내가 집착하는 일 중 하나다.(절이 좋은 이유는 신자가 아니어도
마음 내킬 때마다 거침없이 드나들 수 있다는 점이다. 설령 먹빛 옷을 입은 보살들이 분주히 오고간대도 그 틈을 어정대는 일이 전혀 거리낌 없다. 그들 커뮤니티 만의 연대를 별로 느낄 일이 없달까. 포교에 전투적이지 않다는 점이, 그 자유로움이 나같은 제 주장 강한 무신론자를 잠재적, 심정적 지지자로 몇 걸음 거리에 묶어둘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만 해도 한달에 한두번은 절에 가는 나름 신실한 불교신자인데 단 한번도 나에게 불교 믿으란 말을 한적이 없다.)
마침 연등 건 무량사를 좋아하는 지인이 혼자 있다길래 함께 갔다.
불교 신자도 아니고, 올해 아니면 내년이 있다고 하겠지만, 이상하게도 무량사 연등을 보는 일은 거르기 싫은 나의 연중 행사다.
무량사는 천년 고찰임에도 초파일 밤이 한산한 편이다. 조금만 시간을 비껴 가면 적막할 정도이다. 나는 그 서늘한 봄밤에 절마당에 섰는 일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적요한 고찰의 봄밤, 색색으로 밝힌 고운 등은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나같은 무심한 사람조차 마음 가득 넘치는 감격과 함께
마음에 동동, 한동안 마음에 고운 등을 밝히게 된다. 오늘은 마침 금슬 좋기가 비집을 틈 없는 지인이 모처럼 시간이 난 덕분에
나홀로 절마당을 거닐다 어쩌면 제풀에 겨워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었을 당황스러움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
연등은 세상의 번뇌와 근심을 부처의 지혜와 따뜻한 마음으로 밝힌다는 의미라는데, 참 좋은 뜻이다.
등을 걸며 한 사람이라도 더 그런 생각을 보탠다면 얼마나 귀하고 의미 있는 종교의 발현이랴.
문 닫을 시간이 얼마 안 남은 카페에 들러 차를 마시며 하루를 완벽히, 흡족히 마무리 했다.
명부전 앞의 흰 등 조차도 오늘은 곱다.
<무량사에 대하여> -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서 여러 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 말기의 고승 무염(無染)이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하였으며, 김시습(金時習)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하였고, 조선 중기의 고승 진묵(震默)이 아미타불을 점안하고 나무 열매로 술을 빚어서 마시면서 도도한 시심(詩心)을 펼쳤던 사찰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무량사극락전(極樂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요사채 등이 있다.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에는 동양최대의 불좌상이라 하는 아미타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산신각에는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33호로 지정된 무량사석등과 보물 제185호로 지정된 무량사오층석탑, 절 문 앞에 있는 거대한 당간지주(幢竿支柱), 김시습의 부도 등이 있다. 또한, 김시습이 1493년(성종 24) 이곳에서 죽자 승려들이 그의 영각(影閣)을 절 곁에 짓고 초상을 봉안하였다.
그 뒤 읍의 선비들이 김시습의 풍모와 절개를 사모하여 학궁(學宮) 곁에 사당을 짓고 청일사(淸逸祠)라 이름하고 그 초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이 절에서는 조선시대 상당수의 경판이 간행되었다.
1498년(연산군 4)『법계성풍수륙승회수재의궤(法界聖風水陸勝會修齋儀軌)』를, 1522년(중종 17)『몽산화상육도보설(夢山和尙六道普說)』을, 1470년에서 1494년 사이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源經)』을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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