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제법 거세다.
며칠, 염증이라도 품은 듯 신열에 들떴던 기온이 이제야 찬비에 다독여지는 듯하다.
더운 날씨에 웃자란 식물들과 토대가 허전한 내 마음 모두 이제 제 자리를 찾는 듯하다.
현관 밖으로 몇 걸음 나서 봤더니 몸서리 처지게 비가 차다. 비 다운 비다.
동료의 예고없는 공백에 누군가 남아야 했다.
내가 꼭 남아야 하는 건 아니어서 잠깐 도덕적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을 하였으나
고민이 길어질까봐(다른 동료의 고민까지도) 재빨리 남기를 선언하였다.
어서 가서 잠깐 눈 붙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막상 혼자 남게 되니
하루의 소요가 싸악 가신, 신기한 기분이 들 정도로 적막한 속에서 모처럼 생각의 갈피가 짚이는 듯 하다.
누군가를 위해 책임을 자청한 것도, 책을 펴고 무언가 그럴싸한 일을 하는 듯 착각하는 것도 다 생각보다 훨씬 기분이 좋다.
참 맑은 비다.
비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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