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쇄기를 애용한다
기밀문서를 다루냐고? 그럴리는 없다
나에 걸맞게 하잘것 없는 일들 뿐
보안등급 매길 일이 하등 없는데
보통명사나 다름없는 이름 석자만 들어 있어도
나는 득달같이 달려가 파쇄기에 먹인다
모든 것을 무의미로 치환하는 신묘한 기계
과연 무자비한 절대자, 감탄과 숭배의 념이 절로 솟는다
가끔은 나의 삶도 나의 기밀도 그리하고 싶어라
지리멸렬한 삶일 지언정
그래도 파쇄하고 싶은 것들, 파쇄해야 할 것들이 간혹은 있어서
파쇄기 앞에서 삶을 물리며 가슴을 쓸어내렸으면 한다
진즉 파쇄해 버렸더라면 좋았을 부주의하게 흘리고 다닌 기억들
혹은 그로 하여 빚어진 치사하고 악착같은 조회와 심문과 소환의 지리함
혹은 지나온 길도 가야할 길도 보이지 않는 삶을 간단히 종결짓고
초기화 시켜 버렸으면 한다
하얀 에이포 용지만큼이나 간결히 정리되는 삶, 신비로와라
의지가지 없는 처량한 인생인 건지
나는 고작 파쇄기 앞에서 환생의 엑스터시를 느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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