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짧은 여행에 좀 부대꼈던가보다.
겨울에도 한 번 걸리지 않고 지나갔던 감기가 새삼 오려는지 몸이 오슬오슬하다.
하지만 정오가 가까워지니 마음이 또 스물거린다.
이제 곧 봄도 끝날텐데... 게다가 날씨도 포근하고.
볼 영화가 별로 없다.
조지 클루니 감독의 "킹 메이커"와 정지우 감독의 "은교"를 염두에 두었었는데, "은교"만 남았다.
"은교"가 롱런할 것 같은 예감이어서 "킹 메이커"를 먼저 보려고 했는데.
"은교"를 보았다. 소설은 읽지 않았지만, 그동안 프리뷰를 몇 편 읽어 영화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다. 재미없게스리...
영화가 노쇠에 대한 깊은 성찰에까지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다.
각각의 상황이 유기적 긴밀성을 가지고 결이 섬세한 무늬를 짜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정지우감독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찰나적인 묘사는 꽤나 탁월하다.
이 영화는 적어도 내 나이 또래라면 전폭적으로 공감이 갈 듯 싶다.
기사가 하도 주인공들의 노출수위에 촛점을 맞춰와 어린 친구들이 호기심을 가질만 하겠지만,
젊은 아이들이 가보지 않은 노년의 감정을 공감하기는, 은교같은 아이가 아니라면 그다지 쉽지 않을 것 같다.
막상 영화를 보니 노출 장면의 자극은 없다.
딱 영화의 맥락 만큼이다.
늙은 이적요가 속옷을 갈아입다 자신의 시든 뿌리를 내려다보는 장면과
이적요로 하여금 젊은 제자에게 살의를 느낄만큼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은교와 제자 서지우와의 사랑 장면.
영화의 대부분은 은교의 싱그러운 젊음에 매혹된 이적요의 눈을 통해 보는 은교의 일거수 일투족의 집요한 묘사다.
정지우 감독이 이런 섬세한 관찰이 탁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노년이 된다고 젊은 마음이 늙은 육신에 맞게 변태나 리폼을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나이 들었다고 생각한 이후로 내가 늘 생각해오던 화두는 늙은 육신에 담기에 버거운,
변함없이 젊은 줄 알고 들끓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였다.
이것은 답이 없다거나 너무도 명쾌했다.
아랑곳없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거나 포기하고 담담이, 느릿느릿 시간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것.
그러니까 화두는 내가 어느 쪽을 택하느냐인데, 그 결정이 참으로 어렵다.
힘에 부치는 도전과 응전 속에서 부대껴야 하는가,
아니면 잔불처럼 자꾸만 살아나는 감정들을 다독이며 가늘게 눈을 뜨고 삶을 바라봐야 하는가.
맘대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슬프고 힘든 일이 있을까.
사랑이라는 것...
노년의 사랑은 젊었을 때와는 달라야 한다는 것, 많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 요구된다.
늙어서 젊은 육신을 탐한다는 것은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는 아니어도 동성애 만큼이나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불순하고 탐욕스럽고 추한 짓거리가 된다.
하지만 알지 않는가. 육신이 늙는다고 마음도 같이 시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
봄햇살처럼 눈부시고, 새잎처럼 싱그러운 젊은 육체를 볼 때 누군들 눈부시지 않으랴.
그 육신과 마음의 괴리가 우리를 괴롭게 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게 한다.
또한 사회의 룰은 더욱 단호하다. 욕망을 거세하기를 강요한다.
늙은이에게 존경의 허구를 입히고, 그 옷을 갑옷처럼 두르고 살기를 요구한다.
간혹, 권력, 물질, 재능 따위의 탁월함으로 육신의 노쇠를 만회해보려는 사람도 있지만
그 또한 사회적 룰의 관점에서 볼 때 추함에는 변함이 없다..
노년이 되어 가장 간절히 원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고, 가져서도 안되는 것. 그것이 바로 젊은 사랑이다.
죽음에 멀지 않은 자가 싱그러운 젊음에 죽음의 독을 주입하는 양, 그것은 사악한 죄악이 된다.
나는 어떻게 입장을 정리해야 하느냐구?
결론은 명확하다.
늙은 이적요는 혼자 운다. 한없이 작게 오그라들어서는 숨죽여 운다.
잠시 마음에 피었던 봄꽃은 슬픈 환상,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시를 못쓰는 나는 텃밭이나 일구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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