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들판의 초록은 이제 여름날의 초록이 아니다. 허투루 흘려보낸 한 순간 없이 오롯이 제 앞의 시간을 다 품었다. 그래서 한포기 미미한 삶이 묵근해졌다. 들판 건너 연무 속에는 산그림자들의 중첩.
생각해보면 나의 삶에는 중첩이 없다. 아침을 허겁지겁 달려 일터에 갔다가, 급할 것도 없는 퇴근길인데 또 마음이 자동차보다 더 숨가쁘다. 그 와중에는 잠시의 생각이 비집을 틈도 없어 결국 주저앉아 어리둥절하고 만다.
내 삶에서 부분 부분을 뭉텅 들어낸들 내 삶에도 누구의 삶에도 착오나 차질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나조차 모르는 그림자같은 삶인데, 그 누군들 인지나 해 주는지. 사는 일이 맥없고 시들해지는 것은 삶이 고단해서가 아니라, 정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나름으로 산다고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당당하리. 차라리 쉬이 자족하고 의기양양한 자가 덜 혐오스럽고 덜 가련할 텐데.
본래 삶이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 모른다. 없는 것을 찾느라 더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삶의 총체적 의미를 따져보면, 이 무겁고 무거운 인간의 한 생이 나풀거리는 나비 한마리보다 크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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