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그림

엄마의 겨울(17.11.21)

heath1202 2017. 11. 22. 02:06

며칠 전 드실 음식 몇 가지 가지고 엄마한테 갔더니 잠깐 앉으라 하신다.

보통은 마실 오시는 아주머니들이 내가 가면 일어나시기 때문에 엉덩이도 안 붙이고 물건만 건네고 오는데 그날따라 혼자 계셨다.

장롱을 뒤져 내오신 것은 금붙이 몇 점, 한 평생 지닌 것 치곤 너무 소박해 조금 쓸쓸해 지는, 다 합해 봐야 몇 돈 안 되는 패물 몇 점이었다.

그 중 가장 묵직한 목걸이를 나 가지라 하신다. 횡재했네, 농을 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결혼 때 조차 단 한 푼의 물질적 도움도 거부했던 쌀쌀하기 짝이 없는 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로, 엄마 나름으로 가장 큰 몫을 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패물에 관심이 없고, 가지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워 아이들 돌반지도 바로 처분했던 내가 엄마의 목걸이는 어찌 없애라고.


요즘 엄마는 얼마 안되는 소유물들을 정리하는 데 골몰하고 계신다.

그동안 별 쓸모 없이 품고 살았던 것들은 다 치우고 생필품 얼마간만 남기고 싶다고 하신다.

사실 물욕이 많으신 양반이 아니므로 가지고 있는 살림이래야 단출하기 이를 데 없음에도 엄마 눈에는 넘치고 걸치럭거리는 것 투성이인 모양이다.

정리에 급해진 엄마의 행보가 나는 불안하고 쓸쓸해서 싸하니 마음이 저리고 오소소 몸에 한기가 돈다.

엄마 나이가 여든 둘이니 이해 못할 바는 아닌데, 알아도 참 어렵고 준비가 안되고 준비하고 싶지 않은 것이 엄마를 보내는 일인 듯 하다.

어제는 여러 해를 키워 혼자 들기 버거운, 고목이 되어가는 선인장 화분 세 개를 나에게 떠안겼다.

브라운 썸을 가진 나로서는 큰 걱정이다. 많은 해를 건실히 자라온 화초가 내 손에 얼마나 버텨낼지.

화원에서 들여온 것이라면 돈이 좀 아까울 뿐 걱정할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엄마는 요즈음 마을길을 쓰는데 열심이시다.

돌이켜보니 자식들 착하게 잘 커줘 그것은 감사하는데, 당신하나 사는데 급급해 사회에 보탬이 하나도 못 되었다는 생각이 드신다는 것,

그래서 이제나마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생각하다 청소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삶의 마무리를 고민하고 보람되고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하는 엄마가 참 대단하고 고맙다.

또 인정있고 너그러워 주변에 사람이 끊이질 않고 어른으로서 존경과 보살핌을 받으니 노년의 고독으로 마음 시리지 않고 죽음도 그렇게

담담히 이야기 할 수 있는 모르겠다. 


성정이 차가워 엄마에게도 곁을 주지 않던 내가 어느 결엔가 엄마한테는 비빌 언덕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아쉬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나마 덜 미안하게 부를 수 있는 딸이 있다는 게 엄마에게는 큰 위안이고 안도인 모양이다. 

딸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덜 미안할 텐데, 너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는구나, 하면서도 엄마에게 그 중 편안한 사람이 나일 수 밖에 없으리라.

나 자신에게 어쩌면 늙은 엄마를 돌보는 일은 내가 인간을 생각하고 삶을 생각하고 사람됨을 훈련하는 가장 효과적인 교육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늦게나마 내가 엄마와 이만큼이라도 삶의 교집합을 갖게 되었음이 고맙고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참 여러 해 가꾼 선인장인데 플라스틱 화분이 삭아 마구 부서진다.

분갈이를 해야할 텐데 언제나 하려는지. 나는 고양이가 좋지 화초는 별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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