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인데 나를 호출하다니.
큰 아이가 휴일임에도 일을 해야 해서, 또 기르는 고양이 때문에 집에 내려 오기도 어렵다해서(이 냥이는 귀가만 늦어도 서럽고 분해서 앙탈인 기고만장한 아이다) 내가 서울로 올라갔다.
사실 내 생일 쯤 미역국 끓였다고 화를 내는 정도는 아니지만 미역국 안 끓였다고 서운하지도 않은 나다. 하지만 큰 아이 본 지가 너무 한참 되어서 아이 볼 겸 또 때 맞춰 예매해 둔 연극 "염쟁이 유씨"도 볼 겸 해서 서울에 올라간 게 거창하게도 생일 쇠러 간 셈이 된 것이다.
생활리듬을 깨고 아침 일찍 일어나 구름이 약 먹이고 애들 화장실 청소 하고 밥 챙기고 저녁에 주던 길냥이 밥도 넉넉히 미리 챙겨주고 집을 나섰다. 집 한 번 나서려면 이렇게 번잡하다.
서둔 덕분에 점심 전에 서울에 도착해 점심 먹고 연극 보고 차 마시며 큰 아이 일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부여 가는 막차 표를 예매하려니 매진이다. 어쩌나 하다 일단 공주 가는 여덟시 반차 표를 예매했다. 공주에서 부여 가는 막차는 아홉시 오십오분. 안내 상으로는 열시에 공주 도착이니 막차 타기는 불가능 하지만 운이 좋으면 모를 일이고 안 되면 부여까지 택시를 타야 한다. 택시 타는 경우는 생각 만으로도 속이 쓰리지만 마음을 비우고 편한 마음으로 아이들과의 짧은 시간을 즐기고자 했다.
큰 아이는 아침 여덟 시에 시작했다는 회의가 여섯 시가 되어서야 끝나 식당에 삼십 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짠하게스리. 노는 내가 무색하다. 바쁜 와중에도 어느 틈에 준비했는지 양손에 가득 선물을 챙겨왔다.
케잌, 아주 작지만 어여쁜, 몇 시간 전 내가 어느 가게 앞을 지나다 발을 멈추고 이쁘다 했던 것과 유사한 작은 드라이 플라워 다발(나는 생화가 부담스럽다)과 군더더기 없는 문장의 카드와 그리고 만원짜리로 두툼한 이십 만원의 현금 봉투다.
내가 이렇게 생일 쇨 나이는 아닌 것 같아 아이에게 미안해지는데 아이는 또 이런 게 제 할 몫이라 여기는 것 같고 또 제 몫을 했음에 뿌듯한 것 같다.
아이가 자리를 잡고 마음이 정말 여유로워졌다.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공주에는 아홉 시 오십 사분에 도착했고 부여 막차에 도착했을 때는 오십 오분이었다. 버스를 붙잡아 놓고 표를 끊어왔다. 막차는 오십 육분에 떠났다.
오늘은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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