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창밖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집뒤 마른 잡초 위에 설핏 가볍게 앉은 정도가 아니라 제법 두툼하게 내린 것이었다.
이게 웬일이라니.
창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는 눈처럼 하얀 구름이 곁에 쪼그리고 앉아 나도 창밖을 보았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나의 일과의 시작이 험한 날씨 때문에 그나마 표가 났다.
한참 된 느낌이지만 신학기가 시작되고 고작 너댓새 흘렀을 뿐이다.
이삼일은 집안의 물건들을 치우느라 보냈다.
과하게 넘치는 부엌살림, 여러 해 걸쳐보지 않은 옷가지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버리지 못한 물건들을 골라내고, 심지어 십여년 동안 뭔가 쌓기만 했지
빼내본 적은 없는 다락까지 올라가 덩치 큰 물건 몇 가지도 들어내었다.
미련을 시원하게 떨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조금 과감한 덕분에 크지 않은 집에 작은 숨구멍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날 풀리면 도배도 새로 해야하고 손 볼 곳도 몇 군데 있어 집안을 한 번 뒤집을 텐데, 새로운 삶이란 자고로 이렇게 청소부터 해야하는 것 아닌가
싶어 의식처럼 한 일이었다.
시내버스를 타려는데 정류장 옆에 노점이 크게 벌여져 있다.
깨끗이 손질된 냉이와 무우청이 푸르러 깎아먹고 싶은 무와 그리고 양지 바른 산자락 밭에서 어느 할멈이 쪼그리고 앉아 캤음에 틀림없는
머리 굵은 달래도 한 주먹 샀다. 음식 하는 것을 즐기지 않음에도 노점에 늘어져 있는 채소며 찬거리를 보면 마구 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이었다.
달래 조금 넣고 냉잇국을 끓였다. 밖에 찬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집안에는 봄내가 진동했다. 삼천원 어치 냉이를 얼마나 손 크게 담아 주었는지
커다란 냄비에 한가득 끓이고도 반이 남았다.
무로는 생채를 했다. 누가 해도 생채가 맛이 없을 수 없는 단 무였다.
어차피 내가 먹는 것은 얼마 않되니 인편에 들려 아이들 있는 서울로 보냈다.
작은 아이가 정말 맛있다고 전화를 해왔다.
시간에 쫓겨 살 때 내가 젤 먼저 쳐낸 일은 부엌일이었는데, 이제 시키지 않는 요리 좀 하고는 사람 사는 기분이 몹시 들었다.
청소한 티는 별로 안나지만 충분히 심기일전의 표는 내었다 싶고 마음이 한갖져 졌다.
인근 대학이며 평생교육원이며 프로그램을 찾아 보다가 원하는 강좌가 없어 발 넓은 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했다.
일 그만둔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뭘 벌써 배우려고 하느냐고 했다. 반년이고 일년이고 빈둥거리며 노는게 퇴직자의 정석이라고.
하긴 그렇다. 아침에 느긋이 잠자리에 누워 일나가는 벗들을 생각하는게 낙인 요즘인데, 정말 한 주도 안 된 일이지 않은가.
그래도 기어코 일주일에 한 번 나가는 강좌 하나 신청해 두었다. 신청자가 많아 추첨에 탈락하면 엎어진 김에 쉬자고 놀면 그만이지.
그래도 집에 있으면 몸도 마음도 마구 흘러 내리는지라 책 세 권과 노트 한 권, 연필 여러 자루를 챙겨 한가한 카페로 향했다.
세 시간 쯤 구미대로 책 바꿔 읽다가 궁남지를 걸으면 일과 끝이다.
카페에는 늘 도서관 삼아 나오는 이들이 두엇은 있고, 죽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것이 프랜차이즈 카페의 미덕이다.
음악이 좀 시끄러워 잘 읽히는 미술사를 읽었다. 이어플러그가 필요하다.
한 시간 넘게 궁남지를 걷고 돌아가는 길에 문방구에 들러 이어플러그를 사고 안경점에 들러 새로 돋보기를 맞추었다.
새 삶을 위한 필수 품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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