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책을 읽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핑계일 것이고, 무엇보다도 체력이 받쳐주질 못했다.
하루일을 마치면 시체처럼 쓰러졌다. 깊은 밤, 좀비처럼 서성이던 시간이 그리웠다.
가으내 미술사만 몇 권 읽었다.
미술에 대한 관심도 관심이지만, 그보다는 언제든지 끊어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그림들에 관심이 많이 갔다.
곧 갖게 될 넉넉한 시간을 위해 책을 몇 권 샀다.
고르고 보니, "고통, 인간의 문제인가, 신의 문제인가", "타인의 고통",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세바스치앙 살가두", "고뇌의 원근법", '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이다.
아주 이타적인 사람도 아니니, 얍삽한 연민에서 기인하였음에 분명한 인간의 고통에 관심이 요즘 부쩍 커졌다.
아, 하나는 잘못 골랐다. "고통, 인간의 문제인가, 신의 문제인가"다.
다른 책 옆에 있어서 묻어 골라진 책이다. 독서를 열심히 하는 동료에게 왕창 디스카운트 해줄테니 사겠느냐 물으니
그냥 주면 읽겠단다. 책을 받으며 하는 말이 '당연히 인간의 문제'라 한다. 당연하다.
무신론자이니 신에 대해 고뇌하는 과정을 껑충 뛰어넘은 명쾌한 결론이다.(그런데 그는 과거 세례까지 받은 카톨릭교도였다 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에 그 책의 저자는 왜 그렇게 긴 세월을 걸려서야 해답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의 말은 고통에 대해 다만 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겨낼 힘을 준다는 것'이었다.
고통스럽다고 신에게서 답을 찾아본 적이 없는 이 무신론자에게는 그 또한 별로 감흥 오지 않는 얘기일 뿐.
어쩌면 종교가 선한 의지도 줄지 모르겠지만 그 선이란 것이 결코 절대선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KKK 단원들이 대개 골수 기독교인들인 걸 보면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 모든 것이 인간의 문제.
암튼 평소 고마웠던 그였기에 선물로 주었다.
며칠 전에 타인의 고통을 공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느끼게 한 일이 있었다.
큰 아이가 취직을 했다. 그간 계약직이긴 해도 제법 튼튼한 직장에서 보수 차별없이 일을 해왔기 때문에 취업문제에 대해
여유있게 생각하라며 관망하고 있었는데, 본인은 좀더 빨리 정리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험에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아이는 4차까지 시험을 거쳐 마침내 최종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7천자 자소서부터 나는 기함을 했던 일이었다.
물론 아주 기뻤다. 내 신세를 질 아이도 아니었지만 내 인생에서 중요한 할일 한가지가 마무리된 듯 안도가 되었다.
그런데 이백대 일의 경쟁이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왜 아이의 취업이 장엄한 승리같았을까. 아주 잠깐.
이백명의 경쟁자를 딛고 선 의기양양한 승자의 모습이라니.
무지하게 부끄러웠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피폐해져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뻐근했던 그 감정들은 얼마나 알량한 감상이었단 말인가.
하나를 위해 이백명의 어여쁜 아이들이 어떻게 패배자, 실패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길을 모르겠다. 길이 없는 걸까.
이 정글같은 세상을 종식시킬 길이 찾아지기는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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