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 미술작품, 시청

한 방에 "제이슨 본"과 "태풍이 지나가고"를(16.7.30)

heath1202 2016. 7. 31. 01:42

어제는 여행 후유증으로 뒹굴거리거나 구름이와 며칠 못나눈 사랑을 나누며 쉬었다.

오늘은 황산을 오른 후유증으로 걸음도 제대로 못걸으며 어기적어기적 기어나와 영화관람에 나섰다.

우선 공주 메가박스에 가서 "제이슨 본"을, 다음으로 대전 롯데시네마 둔산점에서 "태풍을 지나가고"를 관람했다.

왜 한군데에서 안 보았냐구?

대전이 공주보다 두당 4천원이나 비싸서, 그리고 "태풍이 지나가고"는 대전에서만 해서.


맷 데이먼은 역시 너무 멋있었고(나이 먹을수록 더하는 저 품격.아무리 거칠고 후줄근해도 빛을 발한다.난 좀체 영화배우 팬은 안하는데... 거부 불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지난번 "환상의 빛"보다 대사가 100배쯤 많아져서 깜놀. 이동진 평론가도 지적하드만.

그래도 뭐 충분히 훈훈하고 따뜻한 영화였다.  다음주에는 그의 다른 영화 "걸어도 걸어도"(이동진 평론가가 히로카즈의 최고의 영화로 쳐준)를

서울 아트나인으로 보러가려 한다.

두 도시를 옮겨가며 영화 두 편을 해치운 참 부지런히 보낸 하루. 짝짝짝.









손석희 님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자료출처: 다음영화>

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 : [태풍이 지나가고] 꿈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태풍이 지나가고>(7월27일 개봉)의 이야기 아래로는 두 줄기 상실의 강이 흐르고 있다. 주인공인 료타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료타와 교코의 이혼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극중에서 파편처럼 틈입될 뿐 온전히 서술되지 않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주인공들은 결국 ‘남겨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냥 선량하거나 정직하지도 않다. 부당이익을 취하기 위해, 료타는 자신이 일하는 흥신소 소장을 속이고 소장은 고객을 속인다. 마냥 사람 좋게 보이는 료타의 어머니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남들이 안 볼 때는 쓰레기도 거리낌없이 버린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뜻하지 않게 남겨진 그 보통 사람들은 이제 다가오는 태풍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무엇을 확인하게 될 것인가.

료타(아베 히로시)는 소설가로 살아가길 원하지만 여의치 않은 현실 때문에 남의 뒤를 캐며 흥신소에서 일한다. 헤어진 아내 교코(마키 요코)와 함께 살고 있는 어린 아들 싱고(요시자와 타이요)를 가끔씩 따로 만나지만,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료타는 아들과의 심리적 거리만 확인한다. 료타의 어머니(키키 키린)는 태풍이 휘몰아치던 날, 자신의 집에 들른 예전 며느리 교코를 설득해 재결합의 다리를 놓으려고 한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고작이라 말할 수 있는 <걸어도 걸어도>와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두 편 모두 키키 키린과 아베 히로시가 모자로 출연하는데, 아베 히로시가 맡은 극중 인물은 이름까지 같다. 모녀가 함께 음식을 만들면서 시작하는 도입부, 대중가요 가사에서 따온 제목 작법(<태풍이 지나가고>의 경우 원제인 <바다보다 더 깊이>)도 공통적이다. 세상을 떠난 누군가가 나머지 가족들의 삶에 드리운 짙은 음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두 작품은 온도나 태도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걸어도 걸어도>의 후반부에서 아들이나 어머니는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다가 이전까지 함께 궁금해했던 스모 선수 이름을 각자 불현듯 떠올리게 되지만 그냥 혼자만 알고 만다. 그런데 <태풍이 지나가고>에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전 대화에서 생각해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피겨 스케이터 이름을 어머니가 떠올린 후 딸에게 곧바로 말해준다. 정확하면서 서늘한 면모가 있는 <걸어도 걸어도>에 비해, <태풍이 지나가고>는 넉넉하면서 좀더 따뜻하다. 


직전에 내놓았던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이번 작품 <태풍이 지나가고>를 함께 묶어놓고 보면, 최근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화술은 확실히 이전보다 친절해졌고 그만큼 더 대중적으로 되었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대사가 좀더 직접적으로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실어나르고 있고, 장면 설정은 좀더 관습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그런 대사로는 종반부에서 어머니가 등려군의 노래에 대해 언급하다가 사실상 이 작품의 주제에 해당하는 말을 길게 늘어놓는 대목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부산행>의 어떤 대사에서도 그런 경우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렇게 노골적인 메시지 대사를 늘어놓게 되면 각본을 쓴 사람은 스스로 그 과도함을 의식한 나머지, 배우의 매력에 기대어 유머러스하게 눙치는 마무리 문장을 추가하기도 한다(여기서는 키키 키린이 “나 지금 엄청난 말을 했지?”라고 너스레를 떤다). 어머니가 우두커니 불단을 마주하고 서 있는 료타를 보고서 “왜 우울해하니? (지금 네가 바라보고 있는) 그 향이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지?”라며 관객들에게 그 마음의 궤적을 곧바로 일러주는 대목 역시 조급한 작법의 예로 지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관습적인 장면 설정으로는 료타의 도박 습성과 관련된 묘사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는 몇몇 대목에도 불구하고 <태풍이 지나가고>가 건네는 위로는 곡진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 이 작품 역시 한 가지 질문을 끈질기게 던진다. 당신은 예전에 당신이 원했던 어른이 되었습니까. 하지만 그 물음 앞에서 황망해지는 관객들에게 <태풍이 지나가고>는 이렇게 슬쩍 덧붙이는 것만 같다. 꿈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삶이 실패한 것은 아니에요.

꿈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삶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이뤄지지 않은 꿈이 뜻하는 것은 그저 그 꿈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다. 그리고 꿈이 곧 삶 자체인 것은 아니다. 료타는 삶의 시제를 계속 착각했다. 미래의 일을 질투하고 과거의 업을 따라갔다. 어쩌면 행복은 오래도록 움켜쥐었던 것을 손아귀에서 놓아버린 후에야 새로 쥘 수 있는 선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할 때면 같은 말을 세 번 거듭하는 버릇이 있었던 료타는 극중 가장 중요한 순간에 어떤 말을 자기도 모르게 세 차례 반복하고서 흠칫 놀란다. 그러자 그는 그 말을 의식적으로 한 번 더 힘주어 되뇐다. 혹시 료타는 애초에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을 그저 위로하기 위해 건넸던 걸까. 그러나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같은 상황을 무기력하게 되풀이하는 관성이 아니다. 조금 늦었더라도, 기필코 한번 더 덧붙여서 믿음을 끌어안으려는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