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답사에서 내게 가장 가슴 아픈 곳이다.
다른 곳은 이제 웬만큼 역사가 되어 자리매김이 되어있고 만만히 의미를 흔들수는 없을 만큼 힘과 가치를 쟁취했다고 여겨지므로
설움과 울분의 차원은 이제 넘었다고 생각한다. 역사서에, 돌에 더 깊이 새겨 넣을 일만 남았다.
하지만 이곳은 현재 진행형이다.
죽음이 어처구니 없었던 것처럼 그 비극의 수습과정도 어처구니 없이 흘러왔다.
억울함이 있으면 응당 위로가 있어야 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은 열 살먹은 아이도 알 상식일 텐데 어떤 이에게 상식을 기대하기가
불가능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얼마나 더 싸워야 하는 것일까. 끝내 싸워 이길 테지만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팽목항(진도항이라고도 했다)은 적잖은 이가 와서 둘러보고 있었지만 철모른는 어린 아이들 말고는 참 조용했다.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나는 세월호 비극에 대해 아무 것도 쓰지 못했다. 헤프디헤픈 내 지리멸렬한 이야기가 아닌데 어찌, 감히,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날 글로 써보려 한적이 있긴 했었다. 쓰려다 '꾸밀' 말을 궁리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고 그 파렴치함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쓸 말이 없다면 진정성이 부족한 탓일 것이고, 인식이 부정확하고 투철하지 못한 탓일 것이고, 글로 쓰는 일이 내 일이 아닌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그 점은 마찬가지여서 단 한 줄도 세월호에 대해 쓰지 못한다. 시 한편 소개한다.
시 "우리들의 중세(박후기)" 일부
......
가슴에 돌처럼 무거운 손을 얹으며
교황은 아침 늦게 광장에 도착했다
교황이 머문 며칠 동안
해가 지지 않았으나,
어둠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성의 여왕은 말문마저 닫은 채
연대기적 패륜의 완성에 몰두했다
소년소녀들은 제물이 되어
바닷속으로 던져졌고, 그들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딸을 잃고 말을 잃은
한 소녀의 아버지가 광장 구석에서
돌베개를 베고 미라가 되어갔다
여왕의 힘센 정부는 소문대로
그녀의 임시정부였으므로.
무너지는 나라 안에 검은 음모만 무성했다
산 채로,
인간을 매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박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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