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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광주 - 윤상원 열사 생가 방문(16.6.4)

heath1202 2016. 6. 6. 11:50

올해로 29차 답사를 기록하고 있는 전교조 논산지회의 답사여행에 참여하였다.

올해는 성지순례라 해도 좋을 만큼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곳으로 일정이 짜여졌다.

이동거리가 만만치 않음에도 누구하나 불평없이 불편을 기꺼이 감수한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역사를 느낀 시간이었고,

비극적인 사건들이어서 슬픔과 함께 적을 분명히 확인하였으며

따라서 앞으로 발딛고 있는 현장에서의 가능한 실천들을 고민해 본 시간이었다.

 

무려 29회의 답사를 기획하고 알찬 교재를 만드시고 내내 안내와 실무를 담당해주신 임선생님,

일정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도청에서의 마지막 결전에서 산화한 윤상원 열사의 생가(주소: 광주 광산구 신룡동 570-1)

방문하였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감회가 남다르다. 열사가 원했을 리 없지만 이제 어쩔수 없는 신화가 되어버린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신화를 신봉하며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윤상원에 관한 자료 -출처:위키피디아>

윤상원(1950년 8월 19일~1980년 5월 27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이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활약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윤개원도 있다.

전라남도 광산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면 신룡리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1979년들불야학 1기에 일반 사회를 가르치며 참여했다.

1980년 5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과 광주시민의 눈과 귀와 입이었던 〈투사회보〉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다가 5월 27일 전남도청 본관 2층 민원실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윤상원의 사인을 두고 '자상', '화상', '총상'이라는 엇갈린 견해가 있었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총상으로 밝혀졌다.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김영철이 윤상원을 매트에 눕힌 뒤 최루탄 때문에 불이 붙은 커튼이 매트에 눕혀져 있던 윤상원에게 떨어지면서 윤상원의 시신에 화상 흔적이 남게 됐다.[1]

1979년에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치렀고, 이를 모티브로 한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가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만들어졌다.

 

마을 입구의 노란 배너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2014?년 화제로 자료의 소실이 있어 다시 꾸민 것이라 한다.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들불야학 동지였다가 불의의 사고로 2년 먼저 세상을 떠난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하였고 그 때 헌정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라"의 일부를 황석영이 차용하여 노랫말을 짓고 전남대 출실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