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울었다.
엄마가 팥죽을 안 남겨 주셔서.
엄마집에서 돌아오는 동안 늙는다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에 울컥해져 집앞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먹먹해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먹먹함에는 마냥 늙었다는 것에 대한 슬픔 만은 아닌, 뭔가, 한자락 따뜻함도 있다.
오늘 아침, 엄마가 아홉 시도 안되었는데 점심 때 팥죽 먹으라 오라고 전화했다. 팥도 삶아 놓을테니 가져가라 했다.
내 몸 위해 손놀려 해 먹는 건 없어도 여기저기 넘쳐나는 몸에 좋다는 정보들은 귀신같이 모아놓고 있는 내가
전에 무심히 팥이 다이어트에 좋다고 한 말을 엄마는 흘려듣지 않았던 거다.
알았어. 점심 때는 모르겠고 암튼, 이따 갈께.
어제 광주에 다녀온데다가 동이 틀 때야 잠자리에 든 사정을 알리 없는 엄마의 휴일 이른 전화에 좀 피곤해하며
늘 나에게 약자인 엄마전화를 한마디 말로 댕강 끊었다.
그리고 난 후 한주 내내 빚진 잠을 벌충하느라 뒹굴거리다가 더는 미룰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엄마를 보러갔다.
쟁여놓고 먹지 않는 칼무트, 귀리, 대마씨, 청국장, 콩장, 유리용기들, 생들기름, 참기름...... 싸가지고 가는 짐이 만만치 않다.
엄마는 엄마를 위해 내가 일부러 사는 줄 알지만 나는 어차피 나혼자는 다 못먹으니까 나눠 주는 것이니 엄마 생각처럼
내가 순수한 효심으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엄마 생각대로 두는 것이 엄마에게는 몇 곱절의 행복일 테니 아무말 안한다.
엄마가 참기름을 보고 반가워해서 놀랐다. 가을마다 햇깨를 구해 참기름, 들기름 짜서 자식에게 나눠 주는 것이 엄마의 일이었는데
정작 당신은 자식들 오는대로 다 들려 보냈는지 참기름이 떨어졌단다.
그래서 말했다. 이제 걱정마요. 내가 사다줄께. 기름집에서 짜는 것보다 훨씬 위생적이고 맑게 짜졌다니까.
들기름도 생들기름이 좋대. 나는 일년 내 작은 병 하나도 먹지 않을 들기름인데 샀다. 다른 물건들도 그렇다. 왜 샀을까. 왜 살까.
내가 소비하지 않으면서 사는 걸 보면 결국 누구에게 나누려고 산 건 맞는 것 같고 그 중 많은 몫이 엄마에게 가니
엄마 생각대로 엄마 주려고 산 것도 맞는 모양이다.
집에 갔는데 팥죽이 없었다. 엄마한테 막 투정했다. 내 팥죽 어딨냐고, 내 팥죽 줘, 그러면서. 그냥 땡깡을 부리고 싶었다.
아주머니들이 한 떼 오셔서 두 그릇씩 드시고 솥바닥까지 다 훑고 막 가셨단다.
딸 줘야 한다고 한 그릇 남겨 둬야지.
아주머니들은 다시 쑤어 주라며, 먹는 것 가지고 뭐란다고 죽이 목에 걸리겠다고들 하셨단다.
엄마는 두어 되는 될 듯 싶게 삶은 팥을 주시며 안절부절, 집에 가 도깨비 방망이로 갈아 팥죽 해 먹던지 죽집 가서 한 그릇 사든지 하란다.
싫다고, 엄마가 해 줬어야지, 억지를 쓰다가, 피식 웃으며 잘 했어요, 아주머니들 와 주시는 게 어디야, 했다.
나는 사실 팥죽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으면 먹으니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한번도 팥죽이 먹고 싶어본 적이 없으니 좋아할 리가 없다.
일년에 한번 쯤 먹고도 아쉬울 것이 없으니 관심없는 음식인 게 맞다. 그러니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팥죽 한 솥을 다 핥듯 깨끗이 드셨다면
그거야말로 팥죽의 효용의 끝판을 본 거다. 다 별미에 흡족했고 한 밥상으로 우애 더욱 돈독해졌고.
엄마집에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는 자식보다 훨씬 더 엄마를 견디게 하는 현실적 위로이고 힘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만만치 않은 이웃에 대한 너그러움에도 더욱 그러하기를 격려한다.
어쩌다 찾아보는 자식보다 엄마보다 이십 년 가까운 어린 나이에도 오며가며 늘 들여다봐주는 몇 집 건너 혜숙이네 아주머니가 자식보다
훨씬 엄마에게는 살뜰한 보살핌이 되고 든든한 힘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것저것, 늘 자신의 찬(거리) 일부를 갈라서 가져오는
오연네 아주머니도 엄마를 흐뭇하게 하는, 살가운 동생같은 분이다. 그 밖에도 엄마집에 상시 마실오시는 몇 분 아주머니들.
솔직히 내가 한결 엄마로부터 홀가분하기 위해서도 그분들은 꼭 필요하다. 전화했을 때 수화기 너머가 왁자하면 나는 안도가 되면서
엄마를 찾아볼 의무감을 더는 것이다. 엄마가 지금 외롭지 않구나 안도하며.
내가 가져간만큼 엄마는 또 한꾸러미 싸준다.
시래기와 된장, 양념을 다 버무려 얼려 놓아 끓이기만 하면 되는 된장국, 이웃집 아주머니가 가져다준 치커리와 다른 쌈채소, 또
누가 가져다준 토마토, 오연 어머니가 가져다준 맛이 참 단 무우로 담근 깍두기. 물론 엄마는 그 깍두기 몇 보시기는 오연네 아주머니에게 돌려줄 것이다.
사실 집에 군것질 거리가 남아나지 않게 마실꾼이 끓지만, 또한 먹을 것이 끊이지 않는 것도 온갖 것 들고 오시는 아주머니들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두 주 만에 엄마한테 갔다. 주말마다 내 즐거움 찾아, 또는 이런저런 구실로, 그리고 늘 너나 잘 챙겨 먹고 건강하라는, 에미 걱정은 하나
할 것 없다는, 바쁜데 보러 올 필요도 엄마말을 자기합리화 거리로 삼아가며 차일피일 들여다 보는 것을 미루었던 것이다.
엄마에게 무심한 나이기는 해도, 특히나 도를 넘는 엄마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더욱 무심한 나이기는 해도, 이제 늙은 엄마는 어쩔 수 없는, 내 목에 걸려 있는 응어리다. 그럼에도 내가 한숨 돌리는 것은 늘 엄마와 함께 늙어가며 서로를 격려하는 엄마네 공동체의 유쾌하고 인정많은 벗들 덕분이다.
그리스 이카리아 섬의 주민들이 장수하는 비결은 몸에 좋은 식생활과 아울러 홀로 살며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사는 생활방식,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자식과 친지, 그리고 이웃과 어울리는 공동체적 가치라 한다. 이말대로라면 우리 엄마도 꽤 오래 사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문득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 인생의 마지막 길을 조금은 잊고, 조금은 든든히 서로 위로하며 함께 가는 엄마의 동지들도 오래오래 사실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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