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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헝거" (16.3.25)

heath1202 2016. 3. 25. 16:31

충청 전라 제주 지역에 이 영화 상영관이 두곳 뿐이다.

다행이 집에서 가까운 전주가 그중 한 곳이다.

전주 디지털 독립영화관에서 토요일 일요일 하루에 한 회 상영한다. 

토요일, 구례 산동 다녀오는 길에 들러 보려고 표 두장을 예매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세상은 말할 나위 없이 불행한 세상이다.

하지만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은 

때로는 역설적으로 가장절한 아름다움이요 거룩함이 되기도 한다.

바비 샌즈의 죽음도 그러하다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아도 적어도

IRA(여기서 그들의 활동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이 필요치는 않은 것 같다)의 단원으로서

목숨을 걸며 살아온 그의 일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고찰해 볼 만은 한 일이었다.

자잘한 일상의 유지조차 버거운 나약한 인간인 나로서 이런 실존의 극단적 선택에 맞딱뜨린다면

어찌할까.

 

영화를 보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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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인간은 질줄 알면서도 싸워야할 때가 있다




줄거리


“옳다고 믿는 것에 제 목숨을 걸 겁니다.”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한 남자


메이즈 교도소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죄수복 착용과 샤워를 거부하며 투쟁을 벌이고 있는 IRA(영국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목표로 하는 아일랜드공화국군)의 조직원들. IRA의 핵심인물인 ‘보비 샌즈’ (마이클 패스벤더)는 자신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대화를 거부하는 마가렛 대처 수상에 맞서 마지막 저항을 시작한다.

*헝거(Hunger)란?
_헝거 스트라이크(Hunger Strike). 단식 투쟁.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영국에 저항했던 보비 샌즈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단식 투쟁을 선택했다. 몸이 정치적 장이 되어가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행위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오고 있다.


늘 그래왔듯이, 정치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1981년 북아일랜드 메이즈 형무소에서 아일랜드 공화군 출신 정치범들의 권리회복을 주장하며 단식투쟁을 주도했던 보비 샌즈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대처 수상이 이끌던 영국 정부에게 샌즈의 투쟁은, 형무소 밖에서는 테러리스트의 폭력, 안에서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폭력에 다름 아니지만, 샌즈의 동지들에게 그의 투쟁은 자신이 가진 중요한 자산인 신체를 무기로 활용하는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최후의 수단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현실참여적인 아티스트인 맥퀸 감독은 영화에서 도덕적 판단을 섣불리 내리지 않는다.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중첩되는 사건의 복합적인 측면을 차분하게 제시하면서 선동이 아니라 성찰이 필요할 때라고 말하는 듯하다. 단식투쟁 돌입 전 샌즈와 신부의 격렬한 토론을 긴장감 넘치게 담아내는 롱테이크는 이 영화의 핵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김선엽)



좋은 기사 : <마이데일리 (곽명동 기자) 기사 편집>

강렬함으로 따지자면, 밀어부쳤다는 뜻이고, 아프다는 건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지키고 관철시키고자 했던 신념이 벽에 부딪혔다는 의미다.

1981년, 아일랜드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의 통일을 위해 싸우는 비합법적 조직) 소속의 보비 샌즈(마이클 패스밴더)와 동료들은 영국 교도소에서 죄수복을 입지 않고 씻지 않는 투쟁을 벌이지만, 영국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자 단식투쟁에 나선다.

‘헝거’에서 몸은 최후의 격전장이다. 영국의 대처 수상은 보비 샌즈를 비롯한 수많은 정치범들의 몸을 가뒀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몸으로 저항을 시작했다. 제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모든 피지배 국가의 국민들이 대부분 동의하겠지만, 정당성을 갖고 있다. 옳은 길을 향한 저항은 떳떳하다.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는 체 게바라의 말은 피지배 민중들의 거둬들일 수 없는 존재 선언이다.

“옳다고 믿는 것에 제 목숨을 걸 겁니다” “내가 실패해도, 다음 세대는 더욱 굳은 결의로 투쟁할 거예요”라며 굳은 신념을 밝히는 장면은 현실과 타협하는 무의미한 삶(보비 샌즈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서려는 의미 있는 삶(이것은 보비 샌즈가 살아가는 단 하나의 이유다)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보비 샌즈의 투쟁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스티브 맥퀸 감독은 보비 샌즈를 비롯한 정치범 뿐 아니라 그들을 감시하는 교도관의 시선도 담아내며 균형을 유지한다. IRA의 살해위협에 시달리는 교도관부터 수감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다 눈물을 흘리는 경찰에 이르기까지 국가 폭력의 실행자로 살아가야하는 자들의 고뇌와 불안도 놓치지 않는다.


마이클 패스벤더는 14kg 감량과 함께 형형한 눈빛으로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신념과 불의에 맞서는 저항을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보비 샌즈가 세상을 떠난지 35년이 지났다. 그는 현재 아일랜드의 국민 영웅이다.


시인 바이런의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질줄 알면서도 싸워야할 때가 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IRA:Irish Republican Army)(자료출처: 다음 백과사전)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아일랜드의 독립을 추구했던, 아일랜드 공화국에 기지를 둔 비공식적인 반(半)군사조직.

IRA의 활동 후반기에 IRA와 그 승계조직들은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던 북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자치운동). IRA는 1913년에 설립된 민족주의 군사단체 '아일랜드 자원군'의 승계조직으로 1919년 1월에 창설되었다.

IRA는 무력으로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를 무력화시키고 아일랜드 민족주의당 '신페인'(Sinn Féin)의 정치적 목표인 독립된 통일 공화국이라는 보다 큰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IRA는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활동해왔고, 위기시에는 IRA 단원들이 모두 신 페인의 당원들인데도 효율적으로 정치적인 통제를 하지 못했다.

IRA는 아일랜드 독립전쟁(1919~21)중에는 15명에서 30명 단위로 매복했다가 기습을 하는 게릴라 전술을 펼쳤고 사보타주를 하기도 했다.

IRA의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영국은 협상을 통하여 정치적 해결방안으로 영국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치령의 신분을 갖는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의 설립을 허용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IRA 단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IRA는 2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한쪽은 평화적인 해결을 지지하고 다른 쪽은 이에 반대했다. 전자는 공식적인 아일랜드 자유국 군대의 핵심세력이 되었고 후자는 '비정규군'이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독립정부에 대항하여 무력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내전(1922~23)중 두 파벌 조직은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 결국은 비정규군이 항복했다.

그러나 비정규군들은 무기를 반납하거나 조직을 해체하지 않고 지하에 있다가 필요하면 무력을 써서라도 통일된 아일랜드 공화국을 달성하겠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음을 끊임없이 정부에 상기시켜주었다. IRA는 새로 인원을 뽑아 불법적인 훈련을 계속했고 간헐적으로 폭력도 행사했다.

1931년과 1936년 정부는 이 단체가 불법단체임을 선언했다. 1939년 IRA가 잉글랜드에서 일련의 폭탄 공격을 감행하자 '데일 에어런'(Dáil Éireann:아일랜드 하원)이 IRA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했는데, 그것은 재판 없이 유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조항의 제정 등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IRA의 영국인들에 대한 행동은 '자유국' 정부를 매우 당혹스럽게 했으며 5명의 IRA 지도자들이 처형되고 많은 단원들이 투옥되었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영국연방에서 탈퇴하여 공화국이 된(1948. 12) 후 IRA는 영국의 일부로 남아 압도적으로 그리스도교도가 많은 북아일랜드를 아일랜드 공화국과 통합하기 위해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주력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초에 간헐적으로 사건들이 있었으나 북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1960년대말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북아일랜드(얼스터)의 가톨릭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배적인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선거·주택·고용 등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얼스터의 가톨릭교도들로 구성된 IRA 부대들이 아일랜드 공화국 안에 있는 IRA의 지원을 받아 얼스터 그리스도교도들과 영국정부관리들에 대해 조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폭력의 확산 정도에 대한 마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 IRA가 분열되었다. 1969년 12월 더블린에서 개최된 '신페인 회의' 후 IRA는 '공식파'와 '임시파'로 나누어졌다. 전자는 혁명 사회주의 아일랜드 공화국 아래 모든 아일랜드인과 얼스터의 가톨릭교도와 그리스도교도들을 합치자고 주장했다.

후자는 프로보스(Provos) 또는 IRA 프로보스라고도 불렸는데, 전자보다 나이가 적고 공공연하게 분파주의자들임을 숨기지 않는 얼스터 가톨릭교도들로서, 자신들과(가톨릭교도들) 아일랜드를 통합시키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북아일랜드로부터 영국군의 철수를 강요하기 위해 폭력전술의 사용을 주장했다. 이 프로보스들은 1970년대 초반에 많은 얼스터 그리스도교도 시민들과 영국군을 살상하는 테러 활동을 자행했다(테러리즘). 1973~75년에는 이와 같은 테러 행위가 줄어들었다가 1975년 이후 다시 자신들의 주장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폭탄과 매복 기습 작전을 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는, 미얀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1세 루이 마운트배튼을 1979년 8월 27일에 아일랜드 더니골 만에 있던 그의 고기잡이 배 위에서 암살한 일이었다. 1980년대초에는 임시 IRA파의 투옥인사들이 일반 범죄자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법적 인정을 받으려고 항의하고 단식 농성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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