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겨볼 마음

근래 들어 가장 추운 날의 걱정(15.12.3)

heath1202 2015. 12. 3. 20:45

궂은 날씨에 날은 일찍 저물고 찬바람은 사정 없이 몰아치니 어디든 서둘러 깃들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로터리에 내걸린 여나므 장의 플래카드들이 광풍에 나부끼며  찢어질듯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한 해 근근한 시간을 쪼개어 연습했을 오카리나 동호회의 발표회가 있습니다. 벌써 맘이 설레어 있겠지요. 나보다 부지런한 이들은 다 기특합니다. 안가보아도 축하합니다. 어느 동네 부녀회장의 딸이 이름도 친목스러운 수영대회에서 2등을 했다는데 그 소녀가 이제 허리 굵은 중년 여인이 되어서, 또 노래교실 할매들 틈에서 소싯적 인어일 것을 생각하면 절대 시시한 일이 아닙니다. 지역 유지들 회의도 있다 하는데 결산보고를 큰소리 없이 마칠런지요. 평생 불황인 사람들이 간판을 바꾸고 다시 새로운 불황을 맞으려나 봅니다. 낡은 건물을 두손으로 얼굴 가리듯 값싼 간판으로 가리고 촌스러운 벽지로 도배나 새로했을 싸구려 호프집과 겨뤄볼 무기라고는 저렴 밖에 없는 커피숍, 한집 건너 한집 사이를 비집어 나는 혹시 혼자 살아는 까 전의도 없 치킨집, 모두가 늘 마지막을 빌며 걸어온 승부를 또 거는 모양입니다. 승부 걸지 않아도 되는 삶이 이 생에 있기는 할까요.

가장 추운 플래카드는 걸린 지가 벌써 보름이 넘은 정신 놓은 노인을 찾는 플래카드입니다. 팔순사진이라도 되는 걸까요. 어쩌자고 이 추운 날, 수박색 저고리 위에 꽃분홍 마고자를 입혔을까요. 공단천 윤기가 비바람에도 번들거리는데, 허수아비같은 노인에게 그 고운 옷이 무슨 보람이었을까요. 빛이 다 사라진 사진 속 얼굴의 눈에는 사람의 그리움 따위 담아본 적이 없는 듯 합니다. 이제 내남 없이 추울 일만 남았는데 노인은 어디로 걸어간 걸까요. 그 앞의 길은 거미줄처럼 무수했을까요, 아니면 백주의 눈부신 그저 하얀 공허였을까요. 중력이 미치지 않는 걸음으로 마침내 이르른 곳은 어디일까요. 숲일까요, 물일까요, 저자일까요, 아무곳도 아닐까요. 비가 못끝처럼 차가운데, 노인은 어느 지붕 밑 들었을까요, 아니면 보는 이 듣는 이 없는 그 어느 곳에서 젖고 있을까요. 한 생의 보람이란 게 고작 이렇게 젖은 플래카드 한 장으로 슬프고 덧없어도 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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