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사람을 함부로 대한 이야기
지난 밤에 악몽에 시달렸다.
차를 몰고 가고 있는데 맞은 편에서 오던 차의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는 이였다. 마주치기 거북한.
상대가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기를 기대하며 시침 떼고 계속 달렸다.
그런데 저만치 멀어지던 차가 유턴을 하였다.
그때부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느 결에 차에서 내려 골목길을 달리고 있었고 그는 이골목 저골목 기웃거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그가 나를 해꼬지 하기 위해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드는데도
나는 죽기살기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반가운 양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오래 전 내가 이십대 초반에 알던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유쾌했고 아주 선량했고 나에게 아주 친절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아이가 불편했다.
그 아이는 언행이나 외모가 세련되지 않았고 문화적인 소양도 부족했으며 그런 약점들을 벌충할 만큼 지적이지도 않았다.
나는 남의 눈에 그런 아이(외적으로 번듯하지 않은)와 내가 연관지어 보여지는 것이 창피했다.
이십대 초반, 얼마나 미성숙하고 허영심 많은 나이인가. 게다가 내 성정이 곱지도 너그럽지도 못했으니.
암튼 아이가 착했으므로 대놓고 거리를 두고 무시할 명분이 없었기에 나는 오히려 더욱 냉정하고 깍듯하게 거리를 두었다.
아이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몰랐겠으며 아무리 착해도 자존심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 아이는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순간까지 나에게 정말 그 어떤 분노나 모멸감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늘 한결같았었다. 내가 조금만 착했더라면 그 아이의 웃음 뒤에서 쓸쓸함을 보았을텐데, 내 오만함이 그만 눈을 가리고 마음을 닫아걸었던 모양이다. 그 아이가 나보다 훨씬 원숙하고 된 인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삼십년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간밤 꿈에서 나는 나의 그 비열한 진실을 꿈을 통해 자백하고 말았다. 마음 속 깊이 나도 내 자신이 부끄러웠었던 모양이다.
지금 그런 아이를 만난다면 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참 좋은 사람 아니었던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잠에서 깨어 삼십년 만에 반성문을 썼다.
<에피소드 2>-약속을 저버린 이야기
이건 정말 마음이 아픈 기억이다.
이천 년 쯤엔가 유럽에 배낭여행을 갔었다.
뮌헨을 가던 길이었던가 쾰른 대성당을 보고 싶어서 쾰른에 내렸다. 전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호텔팩 여행이었는데 낯선 곳에서 호텔을 찾아 밤길을 헤맬 엄두는 나지 않았으므로 쾰른에서 내리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쾰른을 거쳐가는데 쾰른대성당을 안 본다는 것은 아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쾰른 대성당은 쾰른 역을 나서자마자 바로 코앞에서 하늘을 찌르며 서 있었다. 얼른 둘러보고 기차를 타야지 했는데 갑자기 한국말로 말을 걸어오는 할머니가 있었다. 한국사람이었다. 한 때는 수녀였다가 어찌어찌하여 독일에 와서 살게 되었다며 성당 안내를 해주시더니 점심을 대접하겠다며 자기 집으로 가잔다. 독일에도 그렇게 옹색한 집이 있다는 걸 첨 알았다. 수녀원 기숙사 방에 조리도구를 들여놓은 모습이랄까. 단칸에 최소한의 살림도구만을 갖춘.
오랫동안 한국과 연이 끊어진 채 그렇게 살고 있다고 했다. 된장은 어디서 구했는지 심심하게 흉내만 낸 된장국을 대접받고 서둘러 떠날 참인데 부탁하나만 들어달라고 하였다. 자신은 이제 살날이 오래지 않을 텐데, 죽을 때 수의를 하얀 한복으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가장 소박하게 한복 한벌만 지어 보내줄수 없냐며 자신의 치수를 주었다. 신세 진 그 당시엔 그보다 더한 부탁도 흔쾌히 들어줄 것 같았지만 두어주 더 여행을 하고 한국에 돌아오니 같이 갔던 친구가 뭘 그렇게까지...하며 심드렁해 했고 나는 나대로 내 주장을 하지 못한 채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일이 끝끝내 이렇게 잊지 못할 빚으로, 그리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을 줄 알았더라면 비단 한복이라도 지어 보냈을 텐데. 한 인간의 마지막이라면 마지막일 소원 하나를 이렇게 무질러 버고 두고두고 부끄럽고 가슴 아프다.
내가 가장 못견뎌 하는 것이 기다림이다. 내가 기다리는 것도 괴롭지만 그보다 나를 기다릴 누군가를 저버리는 일은 더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우리가 떠난 후 얼마나 그 수의를 기다렸을까. 또 몇 명의 또 다른 사람을 집에 들여 밥을 지어주고 또 수의를 부탁하고 또 실망을 하였을까.
머나먼 땅에서 수십 년을 이방인으로 떠돌다 이제 생의 마감을 준비하매 나는 그깟 무명 한복 한벌을 보태주지 못했다.
한동안 나 자신에 대해 실망스러웠고 또 마음도 무척 아팠다. 그 후 그 누구라도 나보다 신의 있고 따뜻한 사람이 있어 오래 기다리지 않고 가여운 한 인간의 수의 한 벌이 준비되었기를 빌고 빌었다.
우리는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헤어지지만 아무리 반복해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 사람과의 관계인 것 같다.
만남도 중요하고 만남을 가꾸어가는 과정도 중요하고, 만남의 과정을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 어렵다.
사람 수 만큼 사람은 다르고 한 경험이 반드시 다음 경험의 거름이 되리란 보장이 없다.
다만 보편적 진실은 사람을 다하매 인간적으로 정성껏, 그리고 신의 있게 대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의 결과는 나를 위함이 된다. 결국 결과가 어찌 되었던 그리 함으로써
가장 마음 편하고 안도할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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