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의 글 한편을 읽고 나서 "아후, 눈물 날 것 같아." 그랬더니, 앞 자리 동료 왈, "행복하게 해 줄까? 대전에 와. 우리 교회 가면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해져. 맛난 것도 많이 사줄께."
"에효, 어쩌나.......내가 아직 그럴 때가 아니 된듯. 아직은 마음의 평화가 아쉽지 않아용. 아직 많이 아파야지"
"에구, 시를 너무 읽어서 그래."
동료는 시를 아는 사람이어서 흔쾌히 내 말을 응대해 주는데, 사실 내가 글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를 매혹시키는 관련 어록은 넘치고 넘친다. 좀 유치하다고 할 이도 있겠으나.
* 글쓰기는 고통스러운 해방의 마술(프루스트)
* '행복'만큼 작가에게 비생산적인 것은 없다.
* 글쓰기는 '삶은 곧 고통'이라는 것에 대한 증언행위
* '슬픔'은 모든 지각이 무화되는 극도의 쇠약상태이고, 감수성이 날카롭게 벼려지는 상태
* 고통은 생의 미학적 표상의 조건
* 예술가는 삶이 위축되는 대신 의식이 비대하게 발달한다, 등등.
한신교회를 다니는, 정치적으로 아주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동료지만 요즘 성경책을 너무 열심히 읽고 있어 나는 내심 조심스러워진다.
옛날에 기장교회 시국기도회는 숱하게 쫓아다녀서 그래도 그쪽 교파에 크게 거리감은 없지만도, 끝내 내가 넘어가지 않는 선이 있었다.
어처구니 없게 들리겠지만 나는 일단 '主'라는 단어에서 막혔다. 그담에는 맹목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복종의 말들. 니체의 말이 수긍이 갈 지경이었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해석에 집착하다 보면 마음으로 영접하기는 이미 다 끝나버리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것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보다 백배 똑똑한 사람들,나보다 훨씬 오만한 사람들도 순한 양이 되니 내 모르는 오묘함이 있겠으나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굳이 알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고. 그래서 불가지의 영역으로 치워 놓는다.
나는 아직도 방황과 방종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고 그런 내 삶에 흡족하다.
나는 무엇에 규정되지 않고 억압받고 싶지 않으며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사르트르)이고 싶다.
지금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그것에 몰두할 것이다.
그리고 극동의 작은 나라 가난한 시인의 아프고 아픈 시가 그 무수한 인류가 이삼천 년 넘게 읽어 온 성경보다 훨씬 마음에 닿는 걸 어쩌랴.
(구약 읽다보면 어처구니 없는 얘기가 얼마나 많은데.)
공교롭게도 좀 전에 텔레비전에서 "오마이 갓"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인명진 목사, 성진 스님, 김홍기교무(원불교), 이름모를 신부 등이 어우러져 사회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는데
종교를 떠나 친근감 들고 괜찮았다. 특히, 인명진 목사, 물론 한나라당 윤리위원회인가 맡았던 적도 있는 걸로 아는데,
시원시원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상기 종교인들 다 합하면 우리국민 반도 넘는다는데, 불의한 사회현상이 종교인들 잘못이라고
자책이다. 심정은 알겠지만, 종교가 세상을 구원할 날은 없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종교를 아무리 믿어도 마음이 돌같은 사람도 쎘고
종교를 믿지 않아도 마음이 봄바람처럼 따뜻한 사람이 쎘다. 그냥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인간을 바르게 길러내는 방안인데......
,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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