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시가 넘었는데도 하지를 넘긴 지 며칠 안 된 해는 아직도 한 뼘 넘게 남아 있다.
요즘 가끔 강으로 산책을 간다. 아직 습관까지는 아니지만 앞으로 일과로 삼고 싶은 일이다.
집에서 강까지 다녀 오는데는 적당히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딱 적당한 거리다.
해를 한 뼘 쯤 남기고 집을 나서 강둑에 이르면 해가 산에 반 쯤 걸리거나 막 지는 참이고
돌아오는 길은 아직 환하기는 하지만 광채는 사라지고 차분하고 아늑하게 만상에 어둠이 배어들기 시작한다.
길가의 이른 여름꽃들이 거의 다 졌다. 이 꽃들 다음을 대기하고 있는 꽃들이 없어 서운하다.
내일은 봉지 하나 들고 와서 씨앗을 받아야겠다. 내년에 씨 뿌릴 때 쯤엔 씨앗의 존재조차 잊고 있기 십상이지만
사소한 일이나 씨앗을 받는 마음에 조촐한 의식을 치루는 듯한 경건함이 있어 좋다. 하지만 내가 꽃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게
가꾸는 수고를 배제한, 신의 조화처럼 와서 저 홀로 피어 아름답고 나는 경탄만 하는 딱 그만큼, 바로 이기적인 사랑이다.
큰 길 아래 점점 초록이 짙어가는 논들 사이로 하얀 농로가 건강한 핏줄처럼 잘 뻗어 있다.
논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내려다만 본다. 외진 길이라 무서워서다.
강가도 마찬가지다. 둑에 서서 저만치 마지막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강물이나 개망초가 지천인 강변을 내려다보기만 하고 돌아선다.
오늘 돌아오는 길에 보니 가로수 사이로 둥근달이 떴다. 따져 보진 않았지만 보름 하루 이틀 사이인 것 같다.
아직 어둡지 않았으므로 옅은 하늘빛에 중첩된, 제 빛 하나 내지 않는 휘유스름한 달이었다. 보름이 되도록 왜 한
번도 달을 보지 못했을까. 사는 의미를 의심하게 하는 일 중의 하나다. 시간을 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늦은 밤에 휘영한 달밤을 보려고 마당을 내다 보았더니 달 없는 날보다 더 어두워서 저녁에 본 것이 헛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산책이라는 게 보통은 참 평화롭고 여유로운 행위로 여겨진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장 머릿 속이 어수선한 시간인 것 같다. 가닥도 없는 백 가지 천 가지의 생각이 주마등처럼 이어지고
뒤죽박죽 뒤섞여서 어쩌면 내 머릿 속이 가장 치열한 시간 중의 하나인 것 같기도 하다. 보통 나는 지독히 자기중심적, 자기매몰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지만 혼자 걷는 이 시간에는 꽤나 객관적, 상대적으로 나 자신을 대하게 된다. 끊임 없이 혼자 질문을 던지고 분주하게 상대의 자리로 옮겨 앉아 답을 하는 식이다. 그런 과정에서 때로는 기대치 않은 깨우침을 얻기도 하고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내 마음 가짐을 고쳐 먹기도 한다. 성숙해지는 시간일까.
어제는 저녁 바람이 마치 서늘한 실크처럼 부드럽게 맨 살을 어루만지는 것이, 걷지 않았더라면 느껴볼 수 없었을 황홀하게 새로운 감각이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겠지만 그 때는 의미를 주지 않았을 초여름 저녁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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