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교시에 수업이 없음에도 휴대폰, 도로시아 랭의 사진집, 시집 한권,
8온스 커피 한잔, 그리고 카메라를 꾸려 영어실로 올라간다.
안녕, 날 찾지마, 앞의 동료에게 농을 던지고 티나게 기쁜 얼굴로 말이다.
우선,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이 구석진 방에 환히 불을 밝히고
아늑해서 아이들이 졸릴 만큼 살짝 난방기를 켜 놓고, 책상을 정돈하고,
칠판을 지우고 나서 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쇼팽이다. 발라드를 방안 가득 채우고 책을 뒤적인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은 무시로 아이들이 들락날락 하니,
홀로 있는 이 수업 비는 시간이 죽도록 행복한 나만의 시간이다.
이 홀로의 공간에 빠지고 나선 공문 처리할 때 말고는
대개는 이곳에 머물러 있다.
시험이 끝나고 나니 요즘은 아이들하고도 종전을 선언한 상태다.
내가 느긋해진 탓도 있고 아이들이 여유로와 지기도 했고
또 서로에게 익숙해지기도 해서
암묵적인 평화협정을 유지하며 잘 지내고 있다.
게다가 잘 따르는 녀석들도 반마다 몇 몇 생겨 나에게 힘을 보태고.
따라서 이제 나는 이 곳에서 새로운 한 해쯤 견뎌낼 수 있게 된 건가?
처음엔 다시 없게 구잡스러운 애들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내가 사랑에 빠져 버렸다.
너희 마음을 꽤 알 것 같다.
묵혀 두었다가 요즘 꺼내든 랭의 사진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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