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나이가 제법 무겁다(12.02.09)

heath1202 2012. 2. 9. 13:12

나이를 한살 더 먹은지 한달이 넘었지만 내 나이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 1학년 꼬마 녀석이 카톡 사진을 보고 늙어보인다고...(ㅠㅠ).  그래서 말해주었다.  선생님이 **살 이잖니. 늘 가르쳐 주어도 늙어보지 않은 아이들은 숫자와 생물학적 노쇠를 연관짓지 못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어야 조금 이해한다.  니들 엄마보다  열살 위라고... 아하... 그럼 젊어보이시네요.  고맙다. (^^)

새 나이를 내 입으로 발음해보니 참 낯설다.  히유~ 어쩌면 의도적으로 그 숫자를 기피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노쇠를 늘 확인하며 살면서도 그 만만찮은 숫자로 쐐기를 박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꽤 심상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올해는 많이 다르다.

시시때때로 확인하게 되는 육신의 노쇠는 물론 슬프다.  하지만 그 슬픔을 증폭시키는 것은 아마도 마음이 육신과 손잡고 함께 발맞추어 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저지할 수 없는 육신의 노쇠와 달리 마음은 의지가 있으니 떼를 쓰는 아이처럼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린다.  하지만 육신을 따라가지 않는 마음을  세상은 불온하다고 간주하고, 노쇠한 육신에 담긴 욕망은 철없거나 추하거나 가련하게 여기므로 억압하고 거세해야 한다.  거기에 바로 노쇠의 슬픔이 있다.  노쇠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욕망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젊음이 부러운 것은 물론 그 싱그럽고 힘찬 육신 자체에도 있지만, 그보다는 허용되는 욕망의 크기에 있는 것이다.  막막하긴 하겠지만 끝없는 개활지같은 욕망. 

욕망한다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니, 꿈을 빼앗긴 삶은 빛깔이 없는,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정지된 삶. 적막해가는 삶. 

하여 나는 많이 슬프다.  남은 생, 그다지 아름답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쥐꼬리 만큼 인색하게 허용된 욕망조차 서서히 접어가며 타인의 욕망을 수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나이들어 가는 이의 깨우쳐야 할 생존법이다.  그렇게 오래오래 살 것이다.  항아리 속에서 쪼그라들고 있는 무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