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우리나라)/강원도

강릉 허난설헌 생가터(15.8.5)

heath1202 2015. 8. 12. 20:49

<자료:이이화의 인물한국사 편집>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 봉건시대의 굴레에 부대낀 한맺힌 부용꽃

허균과 함께 이달에게 시를 배우다

지난날 우리나라는 철저한 남존여비의 사회였다. 그러한 사회에서 부덕이 높은 현모양처를 여성의 모범으로 꼽기도 했고, 바느질 잘하고 베 잘 짜는 여인을 훌륭한 여인상으로 꼽기도 했다. 이러한 속에서도 과감히 남성을 농락하며 한 세상을 불행하게 산 황진이 같은 여인도 있었고, 규방에서 한숨을 토하며 한에 젖어 산 여인도 있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도 그중의 하나다.

널리 불리는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고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었다. 그 당시 여성이 이름 · 호 · 자를 고루 갖춘 경우가 드물었는데 그녀의 경우는 달랐다. 바로 여성으로서 대우를 그만큼 받았다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명망이 높았던 초당(草堂) 허엽(許曄)이었다. 그녀는 위로 오빠 허성(許筬), 허봉(許)을 두었다. 두 오빠도 중요한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었고, 동생 허균도 어릴 적부터 뛰어난 문사의 기질을 보여 촉망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 허씨 집안을 모두 부러워했고 3허(三許)니 4허(四許)니 일컬으며 형제 시인으로 꼽았다.

이런 명문가였기에 당시 많은 시인들이 이들 집안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 그중에서도 당시 3당(三唐) 시인으로 일컬어지던 미천한 출신인 최경창, 백광훈, 이달 등과 유난히 친분이 두터웠다. 또 천한 신분의 시인 유희경도 이들 허씨의 후원을 입었다. 허성, 허봉 등은 이들 불우한 시인들을 남달리 알아주고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허성, 허봉과 터울이 지는 허난설헌과 허균은 어릴 적부터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지금 남산 밑 마른내길(乾川洞)에 살았던 이 어린 남매는 이달에게서 매일 시 수업을 받으며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렇다면 이달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양반의 혈통을 받았으나 어머니가 기생 출신 첩이어서 서자로 살았다. 이로 인해 그는 낮은 벼슬을 얻었다가 내팽개치고 방랑생활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술을 마시고 시를 토해냈다. 이렇게 하여 그의 시명(詩名)은 당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런 이달에게서 명문 자녀인 이들 남매가 시를 배웠던 것이다.

열 살이 좀 넘어 이달에게 시를 배운 뒤 그녀의 재질은 장안에 소문이 났다. 아름다운 용모와 재치, 그리고 뛰어난 시재는 바로 그런 명성을 얻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신동으로 일컬어졌고 서울 양가의 딸들은 그녀와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녀는 여덟 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는 장편 시를 지었다. 이 글은 저 하늘의 신선이 산다는 백옥루에 대해 상상을 동원해 지은 것이다. 이 글이 언젠가부터 서울 장안에 나돌아 그녀의 시재는 더욱 인정받았다. 나중에 정조도 이를 읽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풍부한 정감은 그때그때 곧바로 시로 표현되었다. 그녀가 이렇게 시를 쏟아내면, 그녀보다 여섯 살 아래인 허균은 이를 애송했고 뒷날 이 시들을 고스란히 옮겨 적어 후세에 전했다. 그러나 그녀도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태어났기에, 나이가 차자 어쩔 수 없이 한 남성에게 시집을 가서 남편을 받들며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양간비금도 

양간비금도

허난설헌이 그린 그림으로, 낯익은 풍경과 어린 여아의 모습이 한 장의 풍속화를 보는 듯 생생하다.

그녀는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안동 김씨 집안의 남편을 맞이했다. 그런데 남편 김성립은 어지간히 변변치 못했던 모양이다. 과거 공부를 했지만 별로 진전도 없었고 더욱이 아내와 시를 주고받을 수준도 안 되어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화락하지도 못했다. 여기에다 아내에 대한 열등감이 쌓여 걸핏하면 기생방에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고 술에 곤드레가 되어 새벽에 돌아오곤 했다.

비록 그녀의 남편이 주먹질을 했다는 따위의 기록은 없지만 부부가 화목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그녀는 달을 보며 신세를 한탄하거나 이불을 둘러쓰고 가슴을 태우거나 혼자 시를 읊으며 한을 노래했다. 그 가운데 유명한 시로 〈규원(閨怨)〉이 있다. ‘규방의 원망’이라는 뜻이다.

비단 띠 깁 저고리 적신 눈물 자국
여린 방초 임 그리운 한이외다
거문고 뜯어 한 가락 풀고 나니
배꽃도 비 맞아 문에 떨어집니다.
달빛 비친 다락에 가을 깊은데 울안은 비고
서리 쌓인 갈밭에 기러기 내려 앉네
거문고 한 곡조 임 보이지 않고
연꽃만 들못 위에 떨어지네
- 《허난설헌집》

지아비의 버림을 받고 규방에서 눈물로 지새우는 나날, 버려져 있는 자신의 처지를 시로 풀었던 것이다. 그런 나날 속에서도 딸과 아들을 두었다. 이제 남편에 대한 애정을 자식들에게 옮겨 정성을 쏟았고 어린 남매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인생의 재미를 느꼈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때보다 더 큰 불행을 맞이했다. 두 자식이 채 봉오리를 맺기도 전에 해를 연이어 죽은 것이다. 이를 어쩌랴. 그녀는 슬픈 마음을 시에 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때 쓴 시가 〈곡자(哭子)〉이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을 보자.

지난 해엔 귀여운 딸을 잃었더니
이번 해엔 사랑하는 아들마저 잃었네
가슴 메어지도다, 광릉의 흙이여
작은 무덤을 나란히 마주 세웠네
······
응당 언니 아우의 혼들이 알아
밤마다 서로 손잡고 놀아라

그녀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딸과 아들의 무덤을 자신이 사는 광릉 땅 양지바른 언덕에 나란히 만들고 나서 낮은 봉분에 잔디를 심고 어루만졌다. 훗날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두 아이의 무덤 뒷자리에 묘를 쓰라고 했다. 그리하여 세 무덤은 광주 지월리의 달을 보고 밤을 지키며 지금도 그대로 있다.

견디기 어려운 세 가지 불행

그녀의 불행은 계속 꼬리를 이었다. 남편의 방탕은 조금도 쉴 줄을 몰랐다. 그리고 행복과 기쁨이 넘치던 친정집에도 풍파가 연달아 이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주에서 객사했고 이어 오라버니 허봉은 이이의 잘못을 들어 탄핵했다가 갑산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허봉은 2년 뒤 풀려나 백운산, 금강산 등지로 방랑생활을 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병이 들어 서울로 돌아오다가 금화 생창역에서 아버지처럼 객사하고 말았다.

이런 친정의 슬픔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했고, 자신의 시재를 알아주었던 인물이 하나씩 사라지는 데 더욱 가슴이 메어졌다.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그리하여 더욱 감상과 한에 빠졌다. 그러다가 한번은 ‘삼한(三恨)’, 곧 ‘세 가지 한탄’을 노래했다고 한다.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 금슬이 좋지 못한 것이라 한다.

첫째는 바로 그녀가 시재를 널리 뽐낼 수 없는 좁은 풍토를 안타까워한 것이고, 둘째는 남성으로 태어나 마음껏 삶을 노래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셋째는 그녀의 남편이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더욱 방탕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녀는 스물세 살에 어머니의 초상을 당해 친정에 가 있을 때 꿈을 꾸었다. 그녀는 꿈속에서, 저 신선 사는 곳에 올라 노닐면서 온갖 구경을 다 하다가 한 줄기 붉은 꽃이 구름을 따라 날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꿈에서 깨자 곧 “붉은 부용꽃 서른아홉 송이가 차가운 달에 떨어졌네”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자신의 죽음을 두고 읊조린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고, 그 죽음의 형상은 곧 신선의 세계였다. 그녀는 많은 한과 원망을 가슴 가득히 안고 스물일곱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죽음은 분명 슬픈 것이었고 한 천재의 한 어린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이에 허균은 이렇게 썼다.

“부용꽃 서른아홉 송이는 곧 스물일곱 살의 자기 죽음을 징험한 것이다.”

혹자는 39는 죽은 아이들 나이를 합한 숫자일 것이라고도 한다.

사후에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리다

그녀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사람은 허균이었다. 허균은 누이의 시를 모아 베껴 세상에 소개했다. 생전에 넓은 중국에 시명을 날리지 못한 것을 한탄한 누이를 위해 허균은 그녀의 시집을 중국 사신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그녀의 시는 중국에 널리 소개되었고, 중국의 여류시인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시를 애송했다.

한편 국내에서도 그녀의 시는 시화(詩話)나 시평을 통해 널리 소개되었다. 어떤 시화에서는 격조면에서 허봉이나 허균의 시가 모두 그녀의 시에 미치지 못한다고 극찬을 했다. 그녀의 시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자, 허균의 정적들은 허균이 그녀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 지은 시를 누이의 시라고 세상을 속였다고 써대기도 했다. 특히 허균이 한글로 《홍길동전》을 써서 미움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죽자, 많은 정적들은 허균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해 이 말을 그럴듯하게 날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의 안목을 갖춘 사람들은 위의 말처럼, 그녀의 시를 오히려 허균보다 윗자리에 놓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여류들, 곧 신사임당, 황진이, 옥봉 이씨, 계생 등을 여류시인으로 꼽으면서 허난설헌을 최고로 보았다. 뒷날 허균은 부안의 기생으로서 뛰어난 시재를 보인 계생을 극진히 사랑했다. 계생에게서 누이의 잔영을 본 것이다. 계생 또한 허균의 시를 좋아했고, 따라서 허난설헌의 시도 남달리 아꼈을 것이다.

그녀의 시는 강렬한 대결의식 또는 시사를 풍자하기보다 원망과 한탄을 주로 노래했지만, 풍부한 시어와 언어 구사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높이 평가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다만 그녀의 말처럼, 한 천재적인 여인이 봉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해 재주를 마음껏 뽐내지 못한 것은 한국 한시문학사의 불행이다. 만약 그녀가 좀더 자유분방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면 아마 훨씬 아름다운 시를 더 많이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흔한 충효나 음풍농월의 주제를 뛰어넘어 인간의 내면세계를 노래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시가 지닌 가치는 높다.

 

 

 

 

 

 

 

 

 

 

 

 

 

 

 

 

 

 

 

 

 

 

규원가(閨怨歌)

젊은 때가 엊그제같더니 하마 이리 다 늙어버렸는고?

어릴적 즐겁던 일 이제와서 말한들 무엇하리.

늙은 뒤에야 서러운 사연 말하자니 목이 메네.

 

부모님이 날 낳으사 고생하여 이 몸 기르실 제,

공경 배필 아니라도 선비 배필 되길 바랬더니,

전생에 지은 업보인지, 중매들여 맺은 부부의 인연이

알고 보니 한양의 한량이요, 장안의 건달이라 

시집살이 조심하길  살얼음을 걷는듯 했네.

 

열 대여섯 살이 되고보니 꽃같은 모습 저절로 피어나,

이 얼굴 이 모습 평생 가기를 바랬더니,

세월은 살처럼 지나고 조물주마저 시기하여

세월이 북이 베틀의 베올 사이 지나가듯 

꽃다운 얼굴 어디 두고 내모습이 미워지네.

내 얼굴 내가 알거니와 어느 님이 날 사랑하리

 

스스로 부끄러워하니 누구를 원망하리?

여러 사람이 떼지어 다니는 술집에 새 기생이 나타났던가?

꽃 피고 날 저무는 봄날의 저녁에도 정처없이 나가서

호사스러운 차림으로 어디에 머물러 노시는고?

집 근처도 모르는데 님의 소식이야 어찌 더욱 알리.

 

인연을 끊었다해도 님에 대한 생각이야 없으리오?

님의 얼굴을 못 보거니 그립기나 말았으면,

하루도 길고 긴데.  한 달은 얼마나 지리한지.

 

규방 앞에 심은 매화 몇 번이나 피고졌는고?

겨울 밤 차고 찬 때 자국 눈 섞어 내리고,

여름날 길고 긴 때 궂은 비는 무슨 일인고?

 

봄날에꽃 피고 버들잎 돋아나는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에도 생각없고.

가을 달 방에 들어오고 귀뚜라미 침상에서 울 제

 

긴 한숨에 지는 눈물 헛되이 생각만 많아.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렵구나.

돌이켜 하나하나 생각나니 이리 살아 무엇하리?

 

등불 돌려 놓고 거문고 비스듬히 안고

벽련화곡 시름겨워 타니,

소상강 밤비에 댓잎 소리 섞여 들리는 듯,

망주석에 천 년만에 찾아 온 학이 우는 듯,

아름다운 손으로 타는 솜씨 옛 가락 아직 남았건만

연꽃 무늬 휘장 친 방이 텅 비었으니 누구 귀에 들리리?

마음 속 애간장은 구비구비  끊어졌네.

 

차라리 잠에 들어 꿈에나 님 보려 하나

바람에 지는 잎과 풀 숲에 우는 벌레

무슨 일로 원수 되어 잠마저 깨우는고?

 

하늘 우에 견우 직녀 은하수로 막혔어도

칠월 칠석 일년마다  어김없이 만나는데,

우리 님 가신 후로 무슨 강이 놓였기에

온다 간다 소식마저 그쳤는고?

 

난간에 비껴서서 님 가신 데 바라보니,

풀 이슬은 맺혀 있고 저녁 구름 지나갈 때

대 수풀 우거진 숲에 새소리 더욱 서러워라.

 

세상에 설운 사람  많다고도 하려니와

운명이 박복한여자로야 나 같은 이 또 있으리?

아마도 이 님 때문에라도 살동말동 하여라.

 

출전 : 고금가곡(古今歌曲)

 

 

 

 

 

*그녀는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 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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