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의 한 꼭지 =>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삶에 질식 당하지 않았던 열 명의 사상가들- =>폭력에 대항한 양심=>위로하는 정신.
요즘 내가 릴레이로 읽어가는 도서들이다.
지금은 세 번째 권 "위로하는 정신" 앞부분을 읽고 있다.
끈질기게 탐구하고 추상하는 능력의 결여로 독서래야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시집(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향의 문제이니 오해 없기를)이나
잘 읽히는 소설이 다인 내가 뜻밖에 이런 책들을 읽게 된 계기는 이러하다.
발단은 평소 구독하는 시사인의 문화-출판 꼭지를 읽다가 서평가(금정연)의 글을 읽고 부터다.
그는 작년(2014년) 한 해 동안 98권의 책을 읽었다는데 한 해를 돌아보며 어느 책이 가장 인상적이었던가 고민했더란다.
주옥 같은 책들이 여러 권 있어 갈등을 하던 참인데 크리스마스 무렵 "삶에 ~"를 읽게 되었다 한다.
그러고는 가볍게 이 책을 작년의 좋은 책으로 선정했던 것이다.
물론 작년에 나는 책을 읽지 않았으므로 그가 읽은 백권 가까운 책도 아는 바 없던 차인데, 그의 추천에 따라 이 책을 읽음으로써
한 권으로 나머지 98권을 가름해 버릴 수 있겠구나 하는 장난스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철학이라면 무서라 하는 내가 큰 어려움 없이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저자인 프레데레크 시프테의 문체가 상당히 문학적이고 어휘가
일상적이라는 점, 형이상학을 적당히 무시해 넘기는 건방짐과 경박함?, 허무주의, 관용과 인문주의에 대한 경도? 등등 나의 성향을 흡족히
채워주는 점들이 여러가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소개된 중에 낯선 사상가들도 여럿 있었지만.)
옮긴이의 말은 "개념의 정확성과 논증의 무오류를 논하고 싶은 사람들보다는 문학적 풍류를 아는 이, 궤변과 요설의 문학적 가치에 민감한 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였고 서평가는 "나는 당신이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으며 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게 소원이었다.
그리고 그 책에 소개된 카스텔리오와 스테판 츠바이크를 좇아 두 번째 책 "폭력에...."를 읽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므로 칼뱅에 대해 아는 바라고는 역사를 뒤흔든 대단한 종교개혁가라는 단순한 사실 뿐인데, 와우, 그 대단한 사람을
조롱거리로 삼은 스테판 츠바이크의 통쾌한 편파성이라니. 전체주의와 독재에 대한 극심한 협오를 품은 사람으로 결국 역사를 감당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맺은 작가였던 만큼 칼뱅의 편협한 인간관, 종교관에 대한 비판은 신랄함을 넘어 조롱의 경지에 이르렀고 누가 보아도 편파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런 점들을 기꺼이 수용하고 넘어 갈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이 그 시대보다 한 걸음도 더 사상적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
에라스무스나 몽테뉴, 카스텔리오 같은 이들의 인문주의와 관용의 정신이 절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세 번째 권 "위로하는 정신"을 몇 쪽 읽었다.
("수상록"은 사전 삼아 색인용으로나 읽어야 할 듯)
작가의 박식함과 방대한 작업량이 놀랍고 문체의 거침없음이 맘에 든다.
그의 책이 두 권 더 기다리고 있다.
진즉 이런 독서의 즐거움을 깨우쳤더라면 하며 요즘 탄식을 하고 있다.
이십 여년 먹고 사느라 바쁘다는 구실로 나는 나의 정신을 너무 방기했던 것이다.
남은 내 생 동안 다시 찾은 이 좋은 습관이 치매가 오기 전까지 오래도록 지속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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