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관람 영화가 정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새 영화가 명절에 개봉된다.
천재수학자로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앨런튜링의 비극적 삶을 그린 영화다.
"와일드"와 함께 영화관 관람 사수 결의!
(자료출처: 다음 영화)
(자료출처: 위키백과)
* 앨런 튜링 관련 정보
<생애>
출생 및 어린 시절
튜링은 1912년 아버지 줄리어스 매시슨 튜링과 에셀 사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인도에서 임신했지만 영국에서 낳기 원해 런던으로 가서 그를 출산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기질을 드러내어 3주 만에 읽기를 배웠으며 계산과 퍼즐에 능했다고 한다.
대학교
193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입학해 수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1935년 확률론 계산에서 한계중심정리에 관한 학위논문으로 킹스 칼리지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1936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7년 영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연구 중 튜링 기계의 개념을 도입한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할 문제에의 응용”을 발표했다.
제 2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1938년 9월 브렛칠리 정부 암호학교 GCCS(현 GCHQ)에 들어갔고, 1939년 9월 4일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하는 Hut 8의 책임자가 되어 폴란드 정보부에서 제작한 에니그마 해독기 Bomby를 개선한 The Bombe를 개발했다.
이런 경험에서 만든 계산이론은 후일 영국에서 개발되는 콜로서스(프로그래밍 가능 전자 컴퓨터)의 기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죽음
그러나 튜링은 당시 영국에서 범죄로 인식되던 동성애자 혐의로 체포된 후 감옥과 화학적 거세 중 선택을 해야 했고,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거세를 선택하여 1년간 에스트로겐 주사를 맞았다. 그는 1954년 6월 8일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주변에 반쯤 먹은 사과가 놓여 있었다. 사망 원인은 부검에 의해 치사량의 시안화칼륨을 주사한 사과를 먹고 자살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2013년 12월 24일, 영국 정부는 국왕 칙명을 통하여 앨런 튜링의 동성애를 범죄로 간주하여 처벌하였다는것에 대하여 정식으로 사면을 발표하였다.
<활동>
대학 이전
튜링은 15살 때 처음으로 수학적 결과를 도출했다. 이것은 역탄젠트 함수의 무한한 연속을 어림잡을 수 있는 계산 형식으로, 크게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이후 튜링의 연구의 전체적인 방향을 보여준다. 즉 그가 평생동안 연구했던 계산할 수 있는 실수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1931~1936)
튜링은 케임브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했으며, 특히 보른의 양자역학 강의와 쿠란트의 미분 방정식 강의를 들었다. 그의 관심은 수치해석을 비롯해 확률론,통계학,수 이론, 군론 등이 있다.
확률론
1933년 튜링은 물리학자 에딩턴의 과학적 방법론을 수강하고 ‘정규분포곡선(courbe normale)’ 이라는 고전적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된다. 튜링은 자연 현상에서 규칙성 연구에서의 ‘중심극한정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독일의 수학자 린데베르크가 1922년 이미 증명했다는 내용을 알 지 못한 채 이를 증명했다. 이 증명으로 그는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수 이론
1939년 튜링은 리만 가설(어떤 함수, 소위 말하는 ‘제타 함수’는 복잡한 면 위에서 직각을 형성하는 어떤 점들에 대해서만 제로 값을 취할 수 있다.)과 소수의 수에 대한 문제에 대질된 튜링은 수치상으로 제타 함수를 평가했다. 이 과정에서 튜링은 제타함수 계산에 쓸 기계를 만들기 위해 장학금을 받아냈으나, 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다가 전쟁 이후 맨체스터 대학에서 다시 시도하게 된다. 이 기계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으나 결국 튜링은 1953년 제타함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군론
군론은 튜링이 평생 연구해온 분야인 수치상의 문제나 계산의 유효성과 거리가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나, 가능한 모든 값의 치환을 통해 함수와 함수 풀이 영역 간의 구조적 상관성이라는 방법으로 튜링의 인생에 세 번의 영향을 주게 된다. 우선 1936년 튜링이 계산할 수 있는 수와 계산할 수 없는 수 사이의 경계선을 연구할 때 구조적인 계산의 유효성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 다음으로 함수이론의 연장선의 문제였고 셋째는 군론을 간접적으로 수치 적용해 양자역학과 해독학에 이용했다. 양자역학에서 군론은 상태 개념에 연관되어 있고, 해독학에서는 치환 개념과 치환 불변성의 개념에 관련되어 있다.
프린스턴 대학(1936~1939)
1936년 튜링은 결정 가능성에 부정적 증명을 해낸 후 프린스턴 대학으로 떠나게 된다. 이 때 튜링은 수리논리학의 처치와 군론의 존 폰 노이만을 만나 새로운 학문의 장을 열게 된다. 3년의 학업 이후 폰 노이만이 조교로 남을 것을 권유했으나 정중히 거절한 튜링은 케임브리지로 다시 돌아왔다.
수리논리학
튜링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만난 처치와 함께 수리논리학의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그는 해결 불가능성의 정도의 산술적 서열을 구축함으로써 해결 불가능성의 개념이 고려된 형식 체계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인식 변화를 일구어냈다.
제 2차 세계대전(1940~1945)
암호학과 통계학 분야에서 튜링이 전쟁동안 진척시켰던 연구 작업은 전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1996년 미국 정부에 의해 폐기되었으나 이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2]) 하지만 “튜링이 없었다면, 영국은 전쟁에서 분명 패했을 것이다”라는 동료 D.미치의 인터뷰 증언 등을 고려할 때 그의 업적을 짐작할 수 있다.[3] 널리 알려진 바처럼 튜링은 당시 에니그마라 칭해졌던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냈으며 당시 컴퓨터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튜링은 수리논리학에서 정의된 계산, 조작 실행에 영향을 준 추상적 기계(알고리즘), 실행화시킨 물질적 기계를 토대로 이후 정보과학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암호학
암호학은 수학, 논리학, 물리학에 연관된 분야로 튜링은 전쟁 선포 이후 암호 부서에 들어갔다. 겨우 열 명의 연구 팀 수장이 된 튜링은 베를린, 독일의 잠수정 등에서 보내온 메시지를 코드화하여 해독하는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튜링은 암호학의 새로운 기틀을 다졌으며 통계학과 기계화 할 수 있는 논리적 방법을 통해 모순을 제거해 나갔다.
정보 개념
정보 개념, 혹은 데이터의 중요도는 원래 통계학적 속성인데, 선험적(a priori)가설로부터 경험적(a posteriori) 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전쟁 후의 튜링(1945~1954)
앨런 튜링은 1945년 10월 1일 테딩턴에 위치한 국립물리연구소(NPL)에서 영국의 첫 번째 컴퓨터라 할 수 있는 전자 계산기 제작을 위한 수학 부서 창설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맨체스터대학 등에서 컴퓨터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이 시기의 튜링은 전적으로 형태 발생과 수학적 모델화에 주력했다. 그러나 동성애로 경찰과 군대의 감시를 받던 중 1954년 42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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