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 만에 시원하게 비가 내렸고, 비 개인 후 창 밖 저만치 보이는 논마다 물이 하얗게 가득해
마음도 모처럼 넉넉해 진 듯한 기분입니다.
내 작은 텃밭의 기아같은 아이들도 모처럼 배가 부르겠습니다.
요며칠 참 각박하게 살았습니다.
아직도 불행처럼 한꺼번에 들이닥친 일들이 그대로 산적해 있어
마음을 가지고 희롱할 여유를 좀체 내기 힘들군요.
하루의 말미는 늘 몸도 신경도 붕괴 직전이라 한치도 생각을 파고들 여력이 없습니다.
당분간은 절대 삶의 의미 따위는 묻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피할 수도 없는 일인데, 심사만 뒤틀릴테니까요.
지금은 아이들 자율학습 감독(자율과 대척에 선 단어 ㅎㅎ) 중이고
그나마 다른 학교에 비하면 시늉 뿐이라 할 만큼 짧은 시간인데
(인근 학교에서는 아홉시 정도까지 자습하기도 하니깐요)
그래도 아이들은 몸살을 합니다.
그 짧은 시간에 서가에 몇 번씩 오가며 책을 바꾸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곯아 떨어지기도 하고.
바깥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잘 모르는 애들이라 경쟁심도 별로 없고
공부량도 형편없이 적은 아이들이라
학교에서 싸잡고 공부를 시켜주길 바라는 학부모들도 있지만,
8교시까지 마친 아이들을 또 붙들고 있는게 참 안 되었단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네요.
이제 집에 갈 때가 다 되어 갑니다.
많이 늦어 운동부터 하고 갈까 하는데 이렇게 지쳐서야 어디 한 세트라도 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아무대고 등을 기대고 가수상태가 되어 잠시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텅 빈 학교입니다.
정말 적막합니다.
내 마음도 적막하라고 속삭여 줍니다.
짐을 싸고 나서야 할 시간입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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