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에 대한 집착은 급기야 도둑질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슬금슬금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주인이 모호하다던가
주인이 관심가져주지 않을 듯 싶은 연필들을 슬그머니 집어온다.
(샤프 연필은 절대 안 됨. 한웅큼 되는 샤프 연필은 어쩔.)
흐뭇하게 쌓여가는 연필, 열 자루 쯤 모았다.
실은, 연필, 쓸 일도 없다.
종일 몇 페이지 넘어가지도 않는 책장에 간간이 밑줄 그을 때,
몇 자 메모할 때, 그게 다다.
그럼에도 연필을 보면 흐뭇하고, 여전히 심이 날카로운데
사각사각 연필을 깎고 있다.
나에겐 이것이 연필의 미덕이고 존재 이유다.
깎을 수 있다는 것.
내 정신을 저렇게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깎을 수 있다면.
나는 또 연필깎기를 돌리기 시작한다.
사각사각사각, 나무가 날에 물리는 짜릿한 느낌.
저 연필로 길고 길게 글을 쓸 수 있다면,
또는 아주 세밀하게 그대를 그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뭉툭해지는 연필심에 반색을 하며
사각사각 다시 연필을 깎을 수 있다면. 사각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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