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우리나라)/경상북도

경주 - 오릉과 첨성대(17.4.10-11)

heath1202 2017. 4. 17. 04:18

하필 비가 제법 거세게 와서 숙소에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다가 '이러다간 체크아웃 시간이 되겠군' 싶어 아고다가격 평일 6만원치고는 제법 깔끔하고 친절한 숙소였던 펜션 <<감성 36.5도(카페를 지키는 여스탶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건만 이름의 의미를 묻는 걸 까먹었다)>>를 나섰다. 막상 나서니 그런대로 괜찮다. 오히려 청량함이 보태어져 만상이 한층 아름답게 보인다. 다만 개화가 이른 편이어서 절정을 넘긴 이곳 벚꽃은 그나마 비에 져 도로에 젖어 있다.  부여에 돌아가 부소산 벚꽃 아래서의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지척에 있던 분황사지며 몇 군데 이정표를 지나쳐 첨성대와 양동마을만 관람하기로 하였다.


























<참고자료:위키백과 편집>


오릉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반면에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2]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1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다.



첨성대

위치 및 구조: 첨성대는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362개화강암 벽돌을 사용하여 원통형으로 축조하였다.높이는 9.17미터. 돌로 27층을 쌓았으며, 꼭대기에는 다시 우물 정(井) 모양의 2층의 천장돌이 있다. 13층에서 15층에 이르기까지 정남향의 네모난 문이 있고, 이 문의 아래로 12층이 있고 위로 13층이 있으므로 첨성대 위아래의 중간에 문이 위치한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수는 362개이다. 내부에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이 장대석을 이루고 있다.

보존상태: 2005년 언론 등의 보도에 따르면 북쪽으로 7.2센티미터, 동쪽으로 2.4센티미터 정도 기울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전문가에 따르면 원인은 북동쪽 지반이 무르고 수분이 많은 탓으로 보고 있으며, 지역 주민들은 한국 전쟁 이후 기울어짐이 심해졌으며 당시 북쪽의 도로를 지나던 탱크 등에 의해 지반이 약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우려할 수준은 아니며, 국내외 연구진에 의한 연구 결과 또한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라고 밝히고 있다. 2016년 9월 경주에 발생한 지진의 여파로 첨성대 위쪽 돌이 탈각되었고, 2017년 1월 복구작업에 있지만 난항을 겪고있다.

용도: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 구조물이 세워져 혼천의(渾天儀)가 설치되었으리라는 생각과, 개방식 ‘’으로서의 관측대라는 견해도 있다. 첨성대는 창문을 제외하면 어느 방향에서나 같은 모양이며, 계절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일구(日晷)를 측정하여 시간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4계절24절기를 확실히 정할 수 있다. 정남(正南)으로 열린 창문은 사람이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오르내리는 데도 쓰였지만, 춘·추분(春·秋分)에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이 창문을 통하여 태양광선이 바로 대(臺) 안의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출 수 있는 위치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동·하지(冬·夏至)에는 창문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므로 분점(分點)과 지점(至點) 측정의 보조역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절기의 정확한 측정에 의하여 역법(曆法)을 바로 잡기 위한 측경(測景)을 목적으로 설립된 규표(圭表), 즉 측경대로서 일구를 측정하는 천문대일 뿐 아니라, 신라 천문관측의 중심지로서, 신라 천문관측에서 자오선과 동서남북 4방위의 표준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첨성대는 그 구조가 상징하는 바 하늘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 가설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의거하여 축조되었으리라고 해석되고 있으며, 27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천상(天象)의 이변(異變)이 있을 때 외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상설 천문대로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첨성대는 어떠한 저서를 참고하여도 별을 관측하였다는 직접적인 내용에 대한 묘사는 들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성대라 명명한 것은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 신라의 천체관측에 관한 기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첨성대를 별을 관측하였던 건축물이라는 이견이 있다.

건립 시점: 첨성대에 관한 최초 기록인 <삼국유사>는 첨성대의 건립시점을 선덕여왕대(632~647)로 밝히고 있고, <삼국유사> 이후의 사서에서도 이에 반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선덕여왕대(632~647년)에 첨성대가 건립된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