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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글모음)- 종교를 떠나 누구라도 공감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진실하고 아름다우며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들로 가득찬 글들이다. 나는 비종교인이고 심지어 무신론자라고 우기기도 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하등 거부감 없이 그의 글들을 읽기를 계속했다. 필력이 대단하다.
<펌글들>
<하나님의 꿈을 살다>(펌: 민들레 국수집)
-서영남의 <<민들레 국수집의 홀씨 하나>>
“세상의 일은 모두 하느님이 계획하시고 사람은 그저 일을 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일을 벌이면 마무리는 언제나 하느님이 하신다. 내가 돈도 없고 대책도 없이 일을 벌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빽’을 믿기 때문이다.”(187)
“사랑은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기준이 되는 생활방식이다. 행복하길 원하면 보잘것없는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 보잘것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행복은 내 스스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일깨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265)
2004년 4월 1일 만우절
앞치마를 두른 채 문밖에 서서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환한 미소가 따뜻하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대접하는 서영남 전직 수사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민들레 국수집의 홀씨 하나>>의 표지 사진이다. 책 앞날개에 적혀 있는 그의 프로필을 훝어본다. “1954년 부산 범내골에서 태어나 1976년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 입회, 1985년 종신서원을 하고 가톨릭교리신학원을 졸업하였다. 1995년부터 전국의 교도소를 다니며 장기수 면담활동을 하고, 2000년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에 파견되어 출소자의 집인 ‘평화의 집’에서 형제들과 함께 지냈다.” 그 다음의 이력은 뜻밖이다. “2000년에 25년간의 수사 생활을 마감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환속했다.” 뒷부분에는 환속 이후 그가 걸어온 삶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범상치가 않다. 이게 뭐지 싶은 마음에 첫 장을 넘기면 작은 십자가 고상 밑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예수께서도 노숙인이셨다.” 무방비로 만난 글귀에 잠시 멍해진다. 하지만 곧 ‘그렇지, 예수도 노숙인이셨지’,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2003년 4월 1일 만우절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배고픈 이들에게 무료로 밥을 제공하는 거짓말 같은 식당이 문을 연 날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노숙인들이나 배고픈 이들에게 국수라도 대접하자는 생각에서 ‘민들레 국수집’이라는 간판을 걸었지만, 며칠씩 끼니를 거른 이들에게 차마 국수만 대접할 수 없어 밥을 짓기 시작했으니 ‘민들레 국수집’은 ‘국수’없는 국수집이 된 셈이다. 하루 민들레 국수집에 다녀가는 이들이 400명에 이른다니, 성공한 식당임은 분명하다. 이 국수집 주인 서영남 씨가 차분하게 털어놓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이 척박한 시대에도 기적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왜 이런 일을 시작했을까? 민들레 국수집 손님이었던 영수 씨도 그 점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늦은 식사를 마치고 국수집 앞에 있는 교회 계단에 앉아 있던 영수 씨는 “난 평생 힘들게 살았어요. 나를 도와주는 이유가 뭐예요?” 하고 물었다.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던 서영남은 “글쎄요, 이유가 없어요. 그저 제가 옆에 있으니까요.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거지요”라고 답한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돕거나,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는다. ‘이유가 뭐예요?’ ‘어떤 관계예요?’ 질문을 하는 이들은 ‘그냥’ 혹은 ‘그저’라는 대답에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이처럼 이유 없는 친절이 의혹어린 시선을 받는 시대에 산다. 자꾸 이유를 묻는 영수 씨에게 서영남은 “음, 영수 씨 건강하게 만든 다음에 고깃배에 팔아먹으려고요”(12)라고 대답한다. 그제서야 영수 씨는 그 친절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언표된 말 너머에 깃든 우정과 사랑에 접속됐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도 받지 않고, 후원회 조직도 안하고, 프로그램에 공모도 하지 않고, 부자들의 생색내기 자선이나 기증도 물리치는 민들레 국수집이 망하지 않고 버티는 비결은 무엇일까? 개인의 자발적인 나눔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힘(21)이라는 못 말리는 믿음이 아닐까? 그렇기에 민들레 국수집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음식 재료가 떨어질까 늘 조마조마하지만, 꼭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씩 공급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내어 드리고 나면 꼭 필요한 만큼 또 다시 들어온다. 그릿 시냇가로 떡과 고기를 날랐던 까마귀는 지금도 여전히 현역이다. 희망은 늘 위태롭다. 위태롭기에 더욱 소중하다.
사람대접
민들레 국수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대접에 소홀함이 없기 때문이다. 민들레 국수집은 무료 급식소가 아니라 환대의 집이다. 곤궁하고 낙심한 사람들의 문제를 직접 처리해 줄 수는 없지만, 찾아온 손님 하나하나를 ‘하느님이 보내주신 고귀한 분’으로 여기고 대접한다(59-60).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따뜻하게 사람대접을 해 줄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민들레 국수집에서는 손님이 아무리 밀려와도 줄을 서지 않는다. 세상의 줄서기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 그곳에서조차 줄을 서서 선착순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면 그처럼 끔찍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배고픈 사람이 먼저 밥을 먹게 하면 서로를 배려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민들레 국수집을 찾는 이들은 인정머리 없는 잔소리를 들을 염려도 없고, 긴 설교나 기도로 기분 잡칠 일도 없다.
민들레 국수집을 찾는 노숙인들은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도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서로를 친근하게 호명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국수집 주인 서영남이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이름과 나이를 묻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은 그들을 한 개인으로 존중하기 위해서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 손님들은 어느새 자기 존재감을 잊으면서 홀로 설 용기를 잃고 자포자기하기 쉽다. 그래서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손님들 스스로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할지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조금씩이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되찾게 되고, 서서히 살아갈 의욕을 얻게 된다.”(51)
서영남은 국수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의 이름을 마치 시험공부 하듯이 열심히 외운다. 누군가의 이름을 호명한다는 것은 그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연루되지 않기 위해 가급적이면 그들을 외면하고 산다. 연루되는 순간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영남은 그들을 김씨 이씨 장씨가 아니라 이름으로 부른다. 부활절 아침 예수의 무덤을 찾아왔던 마리아는 주님이 ‘여인아’ 하고 말을 건넸을 때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주님이 ‘마리아야’라고 부르는 순간 주님을 알아보았다.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순간 노숙인들은 자기 생의 주인으로 호출되고 있음을 자각할 것이다.
서영남은 경쟁사회에서 밀려나 어둠 속에 유폐된 이들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 사회의 축약판이다. 그들은 친절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이기심을 드러내 보이고, 때로는 야비하거나 거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세상살이가 그들의 몸과 마음에 남겨놓은 고통과 열패감은 쉽게 아물 수 없기 때문이리라. 민들레 국수집을 하는 동안 서영남은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술 취해서 다른 손님을 못 살게 굴거나 음식을 접시에 잔뜩 담아놓고 남기는 손님들, 다른 사람이야 기다리든 말든 좁은 식탁을 혼자서 독차지하는 밉상 손님들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술 한 잔 들어가면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변해버리는 손님들에게 강아지, 송아지 등 온갖 욕설을 듣기도 하고, 멱살을 잡혀 끌려다니기도 했지만(235) 서영남은 그들을 VIP라 부른다. 사람이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노숙인들 중에 술이나 경마에 빠져 사는 이들이 많다. 고단하고 참담한 현실과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술주정뱅이는 왜 술을 먹느냐는 어린왕자의 질문에 ‘부끄러워서’라고 대답한다. 왜 부끄럽냐는 질문에는 ‘술을 먹는 것이 부끄럽다’고 대답한다. 악순환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깨뜨릴 힘이 없다. 세상살이에 대한 희망을 일찌감치 접어버린 정호 씨가 그렇고, 이웃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기를 힘들어 하는 이슬왕자 정근 씨가 그렇다. 그런데도 서영남은 그런 이웃들에게 술을 따라 주기도 한다. 오직 술 한 잔이 위로였던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서영남은 가끔 불법을 조장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골판지를 모아 사는 이에게 가끔 값나가는 것을 슬쩍하지 그러냐고 말하기도 하고, 밥집을 찾아올 여비조차 없어 먼 길을 걸어오는 이들에게는 무임승차를 하는 방법도 슬쩍 일러준다. 엉너리를 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안타까움에서 우러나온 말임을 그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우공(愚公)
서영남의 일은 밥을 지어 먹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민들레 국수집이 쉬는 날에는 전국 각지에 있는 교도소와 감호소를 찾아간다. 최고수들이나 장기복역중인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수사 시절에 시작했던 교정사목활동은 환속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이들의 가족이 되어주는 일이야말로 서영남과 그의 아내 베로니카가 가장 깊이 마음 쓰고 있는 일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필요한 물건을 보내고, 영치금을 넣어주고,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눈빛 사납던 제노비아는 베로니카의 옥바라지 10년을 받고는 자기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왔다. 서영남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겨우 10년 만에 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쁨을 누렸다”(140)고 말한다. ‘겨우 10년’이라는 말이 가슴을 친다. 어머니께 불효한 것을 항상 마음 아파하는 꼴베 형제를 대신해서 그들 부부는 매년 어버이날이 되면 꼴베의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하고, 아들 대신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곤 한다. 15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그도 또한 아름답게 변했다. 꼴베 형제가 19년 동안 교도소 공장에서 매월 7만 원 정도씩 받은 작업수당은 지금 ‘0원’이다. 찾아오는 이 없는 재소자에게 넣어주고, 민들레 국수집의 후원금으로 내놓고, ‘민들레 꿈’ 공부방 아이들 학용품을 사라며 다 보내주기 때문이다(144).
한 사람이 참 사람으로 변화되는 일보다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서영남은 사람의 힘으로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사람이 바뀌는 경우는 자기 스스로 바뀌는 것과 하느님이 바꿔주시는 것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안 하시는 게 있다. 본인 스스로가 안 하면 하느님도 못하신다. 스스로 변해야 한다.”(73) 서영남에게 교정사목이란 새 삶을 꿈꾸며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이들을 옆에서 약간 거들어주는 일이다. 살다 보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넘어지고 상처입고 좌절할 때가 많다. 툭툭 털고 일어서야 하지만, 넘어짐을 반복하다 보면 일어설 생각조차 잃어버리기 쉽다. 원망과 미움에 은결든 마음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또 넘어졌냐고 탓하지 않으면서 기다려주고 가끔은 일어서도록 붙들어주기도 하는 이웃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진정한 변화는 성장을 돕는다고 벼를 잡아당겼던 송나라 사람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우직함으로 산을 옮겼던 어리석은 노인의 근기 속에서 움터 나온다. 서영남은 이 시대의 우공(愚公)이다. 반지빠른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우직함은 패배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그런 세상 질서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이들에게는 참 삶에 이르는 길이다.
-꿈을 꾸게 하는 사람
꿈이 절실하면 상황은 따라오게 마련인가? 수사 시절 그는 수도원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수도회의 중요사업들을 결정하는 참사위원회에 ‘달동네 공동체 계획안’을 안건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그 안건은 부결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퇴회를 신청했다. 그는 여전히 수도원을 복음의 정신이 발현되는 곳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조직이나 제도에 너무 얽매이면 복음정신을 망각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165) 있음도 경험했다. 퇴회 후 인천의 한 여관방에 머물고 있던 그를 찾아온 출소자들이 머물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마침내 그들의 보금자리인 ‘겨자씨의 집’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지치고 힘들어 할 때 그를 찾아온 이가 지금의 아내 베로니카이다. 교정사목 활동을 하던 시절부터 알았던 베로니카는 너무나 힘겹게 지내는 서영남에게 자기 집으로 들어올 것을 권한다. 베로니카와 딸 모니카, 그리고 서영남 베드로는 한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소유로부터의 자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기쁨,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투신’이라는 가훈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로 다짐했다(154). 그 가정은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함께 축배를 들 줄 아는 축제의 공동체이다. 서영남이 그 힘겨운 일들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가정으로부터 공급되는 에너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교도소를 찾아다니고 노숙인에게 밥 한 끼 대접하면서 느낀 것은 ‘아이 때부터 돌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중범죄자들은 대개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를 다닐 나이에 이미 막바지 인생을 살더라는 것이다. 한번 자포자기의 경계를 넘으면 돌이키기 어렵다. 그는 “아무리 비뚤어진 인생이라도 아이 때 5년, 10년 정도 사랑을 쏟으면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186)고 믿는다. 따뜻한 가정과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조그마한 집을 만들자는 꿈은 이렇게 잉태되었고, 그 꿈은 ‘민들레의 꿈’이라는 집으로 결실했다. 민들레 꿈 공부방 아이들은 시나브로 변하는 어른들에 비해 기적에 가까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시민운동을 하는 이들이 재정난에 허덕이는 것을 볼 때마다 참 안타까웠다. 그래서 ‘뜻이 있는 사람은 돈이 없고, 돈이 없는 사람은 뜻이 없다’고 탄식하곤 했다. 그런데 이 말을 이제는 수정해야겠다. ‘뜻이 확고하면 돈은 따라오게 마련이라고.’ 교회가 커야 큰일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신학생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고함치듯 “하나님의 일은 뜻으로 하는 것이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일을 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런데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돈이 없다는 핑계로 무지르곤 했다. 큰 소리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서영남이 꾸는 아름다운 세상의 꿈은 다른 이들도 꿈꾸게 한다.
-기적은 있다
영연방 유대교 최고 랍비인 조나단 색스는 이스라엘이 언약공동체로 탈바꿈한 것은, 애굽에서 경험한 이적 때문도, 광야에서 맛본 만나 때문도, 홍해가 갈라진 사건 때문도 아니라 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 하나님을 모실 ‘성막’을 짓기 위해 협력하면서 그들은 분명한 지향을 가진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들레 국수집에서는 성막 만들기의 기적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누군가가 염소고기를 보내오면 예기치도 않던 곳에서 대파와 부추와 오이가 답지하고,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국솥과 석유 버너 살 돈도 생기는 식이다. 그렇게 하여 마련된 염소탕은 선한 사람들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기에 성찬이 된다. 해마다 하는 김장도 기적의 연속이다. 너무 많이 들어와 김치를 보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서영남은 가장 좋은 김장김치 저장법을 발견했다. “바로 민들레 국수집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 김장을 할 수 없는 분들께 김치를 나눠드리면, 하느님께서 잘 보관해두셨다가 다음 해에 또 모자라지 않게 주실 것이다.”(233)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빌2:13)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서영남에게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하나님의 꿈에 지핀 그를 통해 일어난 기적은 다음과 같다.
“2003년 4월 1일에 문을 연 뒤로 민들레 국수집은 선한 이웃들의 도움으로 나날이 번창하고 있다. 2003년 5월부터 느슨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민들레의 집’을 시작해 한 사람 한 사람 민들레 가족을 늘려가고 있고, 2008년 4월 1일부터는 ‘민들레 꿈 공부방’에서 어려운 가정형편의 아이들을 무상으로 돌보고 있다. 2009년 7월에는 ‘민들레 희망지원센터’를 열어 노숙인 손님들이 인간다운 삶을 맛보고 열망하며, 다시 한 번 멋지게 일어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 2010년 2월 21에 문을 연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에서는 배곯고 소외된 어린이들이 없도록 무상으로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고 있으며,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교도소 형제들을 찾아보고 돌보는 일, 가난한 이웃들을 보살피고 돕는 일도 열심히 하고 있다.”(222)
하나님이 서영남을 통해 꿈을 꾸고 계시니, 그 꿈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기대되지 않는가? 서영남은 우리에게 꿈꾸는 법을 아니 꿈대로 사는 법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 서영남은 추천자인 박기호 신부의 말대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성자(聖者)’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생에 짓눌린 채 가쁜 숨을 쉬며 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래도 그는 아무런 판단의 말도 하지 않은 채 환한 미소로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 시선 어딘가에 노숙인 예수가 있으리라.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폴 틸리히는 신앙이란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라 했다. 사로잡힘은 주체적으로 조장할 수도 없고 물리칠 수도 없다. 불가항력이다. 그래서 사로잡힘은 마치 교통사고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느닷없고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다. 예수에게 사로잡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본다. 사로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일심으로 달리긴 했다. 돌아보면 갈짓자 걸음이었지만, 그래도 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 다가섰다 싶은 순간 멀어지고, 멀어졌다 싶은 순간 다가오는 길,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진 그 길이 참 힘겹다.
한국교회가 위기다.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 해도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시적인 위기라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근본적 위기이다. 교세가 확장되고, 대형교회도 많이 등장했지만 복음은 후퇴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경계했던 ‘다른 복음’이 슬그머니 틈입하여 주인 노릇하고 있다. 십자가는 자동차 룸미러에 매달려 대롱거릴 뿐, 많은 이들이 십자가라는 스캔들과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의 루틴을 깨뜨리는 메시지는 수취인 불명이 되어 허공을 맴돈다. 은혜스러운 찬양의 소리는 도처에서 들려오지만, 예수의 벗들의 신음소리는 경청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도 외롭다.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한 가인은 도시 건설자가 되었다 한다. 에덴의 동쪽이 가리키는 것은 ‘불안’, ‘안식 없음’, ‘뿌리 뽑힘’이다.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그 폭력의 흐름은 아직도 잦아들지 않았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든 화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거리를 걷는 이들의 얼굴마다 오랜 피곤이 똬리 틀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졌던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첫번째 질문,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책망이다.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났구나.” 아담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 앞이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천진함을 잃어버린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로 숨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후 사람은 그 마음에 깃든 불안을 달래기 위해 어떤 대상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불안의 대용물 말이다. 누군가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허구렁이 있다고 말했다.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우려니 삶은 힘겹고 마음의 공허는 깊어간다.
두번째 질문,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이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닐 것이다. 가인은 불퉁거린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하나님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아무리 무심해도 그 눌함訥喊을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웃을 지키는 자로 만드셨다. 하나님에 대한 책임, 그리고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한 인간다운 삶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책임이라는 말이 너무 강박적으로 들려서일까? 성경은 ‘책임’을 ‘사랑’으로 바꾸곤 한다.
성경 인물 가운데 노아는 순종의 챔피언이다. 그는 폭력과 부패함이 가득찬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신 하나님도 노아만 보면 흐뭇해 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했다. 방주를 만들라 하면 만들고, 짐승들을 이끌어 들이라 하면 그렇게 했고, 들어가라 하면 들어갔다. 마침내 홍수가 끝났음을 알았을 때도 그는 방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만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일까? 물론 아브라함도 순종의 사람이다. 떠나라 하면 떠났고, 바치라 하면 바쳤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있고 노아에게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책임성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는 일인 동시에, 그를 위해 스스로를 위기에 내던지기도 하는 행위이다. 아브라함은 전쟁 중에 사로잡힌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출정했고,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기 위해 길을 떠난 하나님 일행 앞을 막아서기도 했다. 순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국교회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것은 바로 책임의 윤리이다. 민족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독교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 편에 섰고,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섰다. 그 때 기독교는 젊었다. 야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늙어버렸다. 불의에 대해 저항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벗들인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자리로 내려가지도 않는다. 위선적인 종교인과 지도자들을 향해 ‘화가 있을진저!’라고 일갈하던 예수의 얼굴에는 베일을 덮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만 바라봐 달라고 말할 뿐이다.
야훼는 제국의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세계에 던져진 혁명의 깃발이었다. 하나님은 힘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던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을 지푸라기 강아지로 여기셨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초월적 비전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예수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화려하고 늠름한 이들만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니라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삶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꿈 자체가 불온하기 이를 데 없다.
오늘의 제국은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희소성’의 신화를 가지고 사람들을 쥐락펴락한다. 희소한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한다. 적당한 경쟁이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희소성의 신화에 갇힌 이들에게 ‘적당히’라는 말은 적용되지 않는다. 무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은 루저가 되고 승리한 이들은 득의만면이다. 예수의 세계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불편을 감수하지만, 희소성의 세계는 한 마리 양을 위해 모든 양을 희생시킨다. 욕망의 덫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망각이 깊어지면 주체의 몰각이 찾아온다. 거라사 광인을 사로잡고 있던 레기온이 돼지떼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떼는 비탈길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었다.
기독교는 이런 세계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동안 번영의 복음과 죄 경영(sin-management)을 통해 몸집을 불리느라 바빠, 자본주의의 신화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했다. 왜곡된 정신을 타격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정방향으로 되돌리고, 세속적 가치 질서의 우상적 작동을 막아야 할 교회가 세상에 투항해버리고 만 것이다. 예수 정신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예수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다.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광야 공동체는 애굽과 바로 체제에 대한 대안이었다.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이들에게 일은 창조적 노동이 아니라 고역이다. 고역으로서의 노동은 비인간화를 가속화시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히브리들에게 제시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비옥한 땅을 일컫는 말이라기 보다는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세상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출애굽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나일강물이 피로 변한 사건은 그 위대한 문명이 사실은 밑바닥 계층 사람들의 피를 통해 형성된 것임을 가리킨다. 야훼 신앙은 이처럼 당파적이다. 하지만 그 것은 보편을 지향하는 당파성이다. 헤게모니 장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살 떨리게 경험하는 학교였다. 만나는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졌을 때 주어졌다. 만나는 제대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받아먹는 것이고, 필요한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밥을 함께 나눔으로 그들은 한 식구가 되었고,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서로 함께’라는 뜻의 ‘com’과 ‘선물’이라는 뜻의 ‘munus’가 결합된 단어이다. 신앙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때 든든히 서 간다. 초대교회의 애찬은 바로 이런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신앙 공동체는 또한 하나님의 파토스를 함께 느끼는 이들을 통해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린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나그네, 감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을 외면할 때 우리는 예수님도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을 약자들 속에 숨겨 놓으셨다. 그들 앞에 멈춰서고, 곁에 다가서고, 그들의 몸에 손을 대고, 그들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때 생의 비애는 줄어들고 내적 자유의 공간은 늘어난다. 신앙 공동체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적 세계의 민중적 현실에 연루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가끔 남은 목회 여정의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별다른 목표를 세우지 않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색하게나마 대답한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고, 삶을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축제로 경험하도록 돕고 싶다고 말이다. 신앙생활이란 우리를 동화시키려는 세상의 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여 하나님 마음이라는 중심을 향해 순례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슬아슬하지만 즐거운 탈주이다. “여행자는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는 중세의 격언이 떠오른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삶의 모든 순간은 그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안내인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출구인 동시에 입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통해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하는 일, 그것 말고 목회의 다른 목표를 나는 알지 못한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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